들병이와 노름꾼
좌삼지(左三指)는 거창한 벼슬자리가 아니다.
남원의 어느 파락호 노름꾼을 모든 이가 좌삼지라 부르는데,
처음 듣는 사람은 벼슬아치인지 아니면 좌씨 성에 이름이 삼지인지 헷갈려 한다.
그는 선친한테 물려받은 그 많던 재산을 노름으로 다 날리고
마누라 앞에서 다시는 노름하지 않겠다고 왼손 엄지를 작두로 잘랐다.
그러나 1년을 못가 또다시 노름판에서 몇 뙈기 남아 있던 논밭 문서를 다른 노름꾼 손에 넘겨줬다.
장인 앞에서 왼손 검지를 부엌칼로 잘라내고는 노름판과 영원히 담을 쌓는가 했더니,
두 해가 못가 마누라 금비녀와 옥노리개를 훔쳐 또 노름판으로 달려가 이제는 집에도 못 들어가는 처량한 신세가 됐다.
이런 연유로 왼손은 이제 손가락이 세 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본 이름은 뭇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좌삼지가 그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이 주막 저 주막 노름판을 기웃거리며 뒷전에 앉아 개평이나 뜯고 노름방 소제에 마당도 쓸어주며 밥을 얻어먹었다.
반 거지 신세가 된 주제에도 마누라 근처에 못가니 하초가 뻐근해졌다.
며칠간 개평 뜯은 엽전을 들고 나루터로 나갔다.
버드나무 밑에서 들병이가 눈웃음을 쳤다.
좌삼지는 어흠어흠 헛기침을 날리며 버드나무 밑으로 갔다.
“삼지 어른이 어인 일로 쇤네를 다 찾으십니까요~.”
눈 밑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들병이가 꼬리를 흔들었다.
“목이 마르네, 술 한잔 주게.”
“아예 자리를 옮길갑쑈?”
들병이가 앞장서서 나루터와 이어진 솔밭 속으로 들어갔다.
소나무 그늘이 짙고 사방으로 칡넝쿨이 둘러쳐진 안방터에 들병이가 옆구리에 끼고 온 돗자리를 깔았다.
들병이가 하얀 종아리가 드러나게 고쟁이를 올리더니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았다.
탁배기 호리병을 다리 가운데 놓지 않았다면 검푸른 수풀 아래 옥문이 그대로 보일 뻔했다.
좌삼지가 탁배기 한 잔을 단숨에 마시고 나자 들병이가 육포 한 조각을 입에다 넣어줬다.
“목을 축였으니 나는 갈라네, 얼마인가?”
좌삼지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삼지 어른 왜 이러세요.
쇤네 오늘은 처녀야요.”
들병이가 눈웃음쳤다.
“마수걸이도 못했구나.
요즘 해웃값이 얼만가?”
“원래 한 냥입니다만, 삼지 어른께 술값은 받지 않겠습니다요.”
좌삼지가 구겨진 갓을 벗고 허리끈을 풀자 들병이는 치마 밑으로 고쟁이를 벗어내렸다.
철퍼덕 철퍼덕… 헉헉.
좌삼지가 푸~ 긴 숨을 토하고 들병이 가랑이 사이를 벗어났다.
들병이 손에 한 냥을 쥐여주고 담배를 문 좌삼지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하루 열 탕을 뛰어도 고작 열 냥밖에 안되네.”
들병이가 주먹으로 좌삼지 가슴을 토닥이며 눈을 흘겼다.
“내가 쇳덩이요? 열 탕을 뛰게!”
좌삼지가 정색을 하고 장광설을 늘어놓자 들병이 귀가 금세 솔깃해졌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나루터에 들병이가 나타났는데 모습이 확 달라졌다.
얹은머리를 풀어 쪽머리로 바꿨고,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길게 내려 종아리를 감추고
분도 바르지 않아 그냥 여염집 아녀자가 됐다.
좌삼지가 보더니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은 첫배를 타고 물안개가 자욱한 강을 건너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리산 자락 조그만 고을 구례의 한적한 변두리에 조용한 찻집이 생겼다.
남편은 좋은 야생차를 구하러 섬진강 따라 지리산을 헤매느라 열흘이나 보름 만에 집에 들어오고, 우아한 부인이 찻집을 지켰다.
밤늦게까지 찻집 문을 열어두지만, 술은 팔지 않았다.
이 고을에서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 그리고 선비들이 찾아왔다.
주막은 술 취한 장돌뱅이들로 떠들썩하지만 찻집은 지체 높은 양반들이 차를 마시며 고담준론을 펼친다.
허나, 아무리 점잖은 남자라지만 남편은 열흘이고 보름이고 집을 비운 채
얌전한 부인만 찻집을 지키는 상황에는 마음이 동하기 마련이다.
야심한 시간에 증산골 오 진사가 찻집 문을 두드렸다.
고쟁이 바람으로 문을 연 찻집 여주인이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어머머~ 우리 그이인 줄 알았네.”
술 냄새를 풍기며 오 진사가 그녀를 덥석 안았다.
처음에는 저항하던 여주인이 이내 불덩어리가 되었다.
불꽃을 태우며 뒹굴었다.
오진사가 부르르 떤 후에 부리나케 떠났다가 이튿날 낮에 찻집에 홀로 와 차를 한잔 마시고
무려 스무 냥을 차 한잔 값으로 놓고 나갔다.
찻집 여주인이 무릎을 치며 혼잣말했다.
“무려 스무 배야!
좌삼지 말이 맞네!”
오 진사부터 이 초시, 황 부자, 이방 나리, 양천골 훈장 장 참봉까지….
모두가 자기 혼자 찻집 여주인을 안고 있다고 생각했다.
최하가 열 냥, 최고는 황 부자로 서른 냥!
어느 날 밤, 지리산을 헤매던 남편(?) 좌삼지가 내려왔다.
질펀하게 일을 치른 찻집 여주인이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어났더니,
좌삼지는 그동안 모아뒀던 돈을 몽땅 털어 도망을 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