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청이와 심 봉사
심 청이와 심 봉사
봉사인 아버지와 댕기를 늘어뜨린 딸이 홍천 고을로 이사왔다.
저잣거리 뒷골목 끄트머리, 조그만 초가삼간에 똬리를 틀었다.
봉사 아버지 성이 손 씨인데도 사람들은 심 봉사라 부르고,
이팔청춘 딸도 제 이름이 있건만 사람들은 심 청이라 불렀다.
저잣거리에 사람들이 쏘다니는 시간에, 심청이가 명아주 작대기를 잡고 앞장서 걸으면
심 봉사는 작대기 끝을 잡고 뒤따라와 저잣거리 한 모퉁이에 거적때기를 깔고 앉아 사주팔자를 본다.
심 봉사 몰골이야 봉사 점쟁이 모습 그대로 볼품없지만,
그의 딸 심청이는 저잣거리가 훤해지도록 깜짝 놀랄 만한 미인이다.
동백기름도 안 발랐지만 반짝이는 흑단 머리에 사슴 같은 큰 눈, 짙은 속눈썹,
오똑한 콧날에 새빨간 입술은 도톰하게 다물렸다.
사람들은 저 아비 씨에서 어떻게 저런 예쁜 딸을 낳았는가 쑥덕거리기 일쑤였다.
항상 고개를 숙이고 말 없이 다녀 그녀 목소리를 들어본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 들어봤다며 쟁반 위에 옥구슬이 구르는 소리라느니 꾀꼬리 소리라느니 뜬소문이 돌았다.
저잣거리 장사치들은 가게 문을 열어놓고 심청이 지나가기를 목을 빼서 기다리고
저녁나절 가게 문을 닫을 때도 심 봉사를 데리러 오는 심청이를 기다린다.
동네 아낙네들은 묵이다 떡이다 호박죽 같은 별식을 하면 불쌍한 심청이에게 갖다주는 걸 잊지 않는다.
심청이는 깍듯하지만, 입이 무거워 아낙네들은 세 살 때 어미가 돌아가 아버지 심 봉사 손에
자랐다는 것밖에 캐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심 봉사도, 심청이도 보이지 않자 심 봉사가 아파 누웠다느니 죽었다느니
뜬소문이 돌았는데
두어 달 후 밝혀진 사실에 모두의 입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천석꾼 부자 오 참봉에게 심 청이 팔려갔고 심 봉사는 마음고생으로 드러누웠다는 것이다.
오 참봉은 엄청나게 부자다.
드넓은 문전옥답뿐 아니라 보릿고개에 장리쌀을 놓아 몇 뙈기 논밭에
식구들 목을 매는 소농의 논밭을 뺏다시피 하고 저잣거리 가게들을 거의 다 소유하고 있어
거기서 나오는 세가 곳간의 곡식보다 더 많다.
심 봉사가 사는 집도 오 참봉의 셋집이다.
오 참봉이 심청을 데려오려고 오천 냥을 줬다느니 만 냥을 줬다느니 논 스무 마지기를 줬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지만, 오 참봉도 심 봉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꽃다운 나이에 오 참봉 첩실로 들어간 심청이가 자나깨나 아버지 걱정으로 미간이 펴질 날이 없자
오 참봉은 심청이의 친정 출입을 허락했다.
심청이는 오일 장 터울로 하룻밤씩 제 아비 집에서 빨래도 해놓고 반찬도 만들어놓고 거기서 잤다.
한번 가면 이튿날 점심나절 전에 오 참봉집으로 돌아오던 심청이가 어느 날은 저녁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연유를 확인하러 갔던 집사가 돌아와서 오 참봉에게 고했다.
“대문을 뜯고 들어갔더니 집이 텅 비었습니다, 어르신.”
오 참봉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뭐 하는 게야.
빨리 사또에게 발고하지 않고….”
집사는 “벌써 사또를 뵙고 자초지종을 모두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 하인들도 모두 모였습니다.”고 했다.
오 참봉에게 하도 얻어먹은 게 많아 그를 상전처럼 모시는 사또가 육방관속을 집합시키고
포졸들을 풀어 나루터와 고갯마루를 지켰다.
파발마는 바람처럼 달려 횡성·춘천 관가와 합동작전을 펼쳤다.
봉사 아비와 미모의 딸을 신고하는 자는 삼천 냥의 포상금을 지급한다는 방도 나붙었다.
백 리 밖까지 그물을 쳐서 조여봤지만 오리무중. 봉사와 딸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산 속에 숨어 있을세라 인근 산도 이 잡듯이 뒤졌다.
한 달이 지나자 오 참봉만 열이 끓어 오를 뿐 사또는 시들해졌다.
사방팔방으로 심청을 찾아다니던 하인들도 주막에서 술만 마시다가 하루해를 보냈다.
석 달이 지나자 나루터와 고갯마루에 상주하던 포졸들도 원대복귀했다.
오 참봉은 화병이 나서 드러누웠다.
안개가 자욱한 어느 날 새벽, 심 봉사가 살던 집 바로 옆집에서 한 남자와 장옷을 덮어쓴 여인이
슬며시 나와 홍천강 나루터에서 첫 배를 타고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심 봉사와 심청이가 석 달 동안 숨어지내던 옆집은 부인이 아파 약값을 대느라
오 참봉에게 고리채를 빌렸다가 논과 밭을 뺏긴 박 서방네였다.
안개 속으로 사라진 심 봉사는 사실 장님도 아니고, 심청은 심 봉사 딸도 아니다.
“첫날밤, 오 참봉 몰래 돼지피를 요에 묻히다가 들킬 뻔했지요.”
“조심해야 혀.
이번엔 경상도 땅으로 가볼까나.”
남녀 이인조 사기단은 성큼성큼 남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