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일찍 여읜 민국
어머니가 이초시와 재혼하면서
글공부에만 몰두하는데…
민국이 여섯살 때 아버지 박 서방이 이승을 하직했다.
민국은 장날이면 아버지를 따라 장터에 가서 깨엿이며 강정을 사먹던 일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아부지 등에 업혀 외갓집에 가고, 목마 타고 원두막에도 갔었지.”
민국이는 날마다 아버지 묘소에 가서 흐느꼈다.
동지섣달 추운 날엔 아버지 무덤을 덮어 주겠다며 이불을 들고 나서다가
어미와 부둥켜안고 눈물바다를 이루기도 했다.
민국 어미는 남편이 죽자 평소 하지 않던 농사일에 매달려 근근이 입에 풀칠할 정도로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해 봄날, 못자리를 내야 할 그 바쁜 철에 몸이 불덩이가 되면서 덜컥 몸져누웠다.
민국이네는 이듬해 보릿고개에 논을 팔았고, 야금야금 밭도 팔았다.
그러자 민국 어미한테 호되게 당하고 발길을 끊었던 매파가 다시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미가 열살된 민국이를 앉혀 놓고 말했다.
“너만 없었다면 나는 벌써 목을 매 니 아부지한테 갔을 텐데…. 그래서….”
민국 어미가 재취로 들어간 집은 점잖은 선비, 이 초시네다.
3년 전에 아내를 앞세운 뒤 무자식 홀아비로 지내다가 과부인 민국 어미를 재취로 맞아들인 것이다.
이 초시는 인품이 온화하고 입이 무거운 양반이었다.
민국 어미를 따뜻하게 대하고 민국에게도 항상 미소를 보냈다.
민국이는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글 공부가 쑥쑥 늘었다.
하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어머니를 호강시켜 주고 자신을 비단옷 입혀서
서당에 보내주는 이 초시를 향해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이 초시와 한자리에 앉는 것도 꺼리고 눈이 마주치는 것도 피했다.
민국이는 자기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글 읽기에만 몰두했다.
사서를 떼고 삼경에 들어가자 훈장님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민국에게 어느 날 어미가 하늘이 무너지는 말을 전했다.
“오늘부터 너는 박민국이 아니라 이민국이다.”
“어머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박민국으로는 과거를 볼 수 없다.”
민국이는 밤새 울었다. 이튿날 서당에도 가지 않은 채 막걸리 한병을 들고
아버지 묘소에 찾아가 절을 올린 뒤 통곡했다.
“아부지! 나는 박민국입니다. 정승이 된다 한들 이민국은 아닙니다.”
다음날, 이 초시가 출타한 틈을 타 민국이는 사랑방 다락에 들어가 많은 돈을 훔쳐 가출했다.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저녁나절, 초라한 행색의 민국이가 나타났다.
두루마기에는 땟국물이 흐르고 갓은 찢어졌으며, 짚신은 해져 새끼로 동여맸다.
어느새 훌쩍 청년이 된 아들을 안고 눈물을 쏟는 어미를 부축해 안방에 들어온 민국이는
두루마기를 풀고 허리춤에 찬 둥근 쇠붙이를 보여줬다. 마패였다.
“네가, 내 아들 민국이가 장원급제를 해서 암행어사가 되었단 말이냐!”
잔치판이 벌어졌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민국이 서당 친구들도 찾아왔다.
밤중에 닭을 열두마리나 잡고 술독이 바닥났다.
그믐달이 감나무 가지에 걸린 새벽, 모두가 술에 떨어져 이방 저방 코고는 소리만 요란한데
민국은 단봇짐을 짊어지고 집을 나섰다.
길을 걷다가 단봇짐이 너무 무거워 고갯마루에서 풀어 보니 엽전 꾸러미가 가득 들어 있었다.
3년 후, 사모관대에 어사화를 꽂은 민국이가 말을 타고 내려왔다.
어미는 소복을 입은 채 덤덤하게 금의환향한 아들을 맞았다.
“네가 그렇게도 외면하던 이 초시가 돌아가셨다. 네가 가짜 마패를 차고 왔을 때
이 초시는 그걸 뻔히 알면서도 잔치를 베풀어 줬고, 네 단봇짐에 엽전 꾸러미도 몰래 넣어 두었다.”
민국이는 이 초시 묘소에 어사화를 꽂고 엎드려 통곡했다.
“아버님, 이민국이 진짜로 장원급제해서 돌아왔습니다.”
울음소리는 골짜기를 울리며 끝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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