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285

품격 있는 적선

조 진사 대신 술값 계산한 점쟁이 친구 며칠 후 거액의 복채를 받게 되는데… 조 진사가 지필묵을 사려고 오랜만에 친히 장터에 나왔다. 세후 첫 장날이라 점쟁이 좌판이 보였다. 조 진사는 ‘올해 운세나 한번 볼까나’ 하고 발걸음을 멈추고, 거적때기를 깔고 쪼그려 앉아 있는 점쟁이 앞에 두루마기 자락을 추스르며 주저앉았다. 꾀죄죄한 점쟁이가 육갑을 짚어보더니 “칠월에 물 조심만 하면 운수대통은 아니더라도 무병무탈이오.” 조 진사가 껄껄 웃으며 “이 나이에 무슨 대통할 일이 있겠소, 무병무탈이면 족하지.” 바로 그때,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어~이게 누구야!” 점쟁이와 조 진사는 서로 두손을 마주 잡았다. 두사람은 국밥집에 마주 앉아 탁배기 잔을 부딪히며 지난날 서당시절로 얘기꽃을..

사미승 차림의 내아들

가족 잃고 30년간 객지 떠돈 홍 생원 관상쟁이로부터 묘한 말을 듣는데… 홍 생원도 이제 기력이 옛날같지 않다. 고개 하나 넘는 데 벌써 두번째 눈밭에 털썩 주저앉은 참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다 곰방대에 담배를 쑤셔넣는데 바람 소리뿐인 적막강산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가봤더니 어미 고라니 한마리가 올무에 걸려 발버둥치다 지쳐 쓰러져 있고 새끼 두마리는 어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홍 생원이 올무를 풀어주자 어미는 일어나 새끼 둘을 데리고 사라지며 등 너머로 몇번이나 홍 생원을 돌아봤다. ​ 홍 생원은 방물고리짝을 메고 재를 넘어 주막에 들어섰다. 세밑이 되니 손님이라고는 가끔 마주쳐 얼굴이 익은 떠돌이 관상쟁이뿐. 주막이 휑하니 평상에 눈만 쌓였다. ​ 평소에는 대작하는 사이가 아니지만 주모와 함께 ..

하늘과 땅

대과에 떨어지고 고개 떨군 덕구 권위 찾으려 계책을 꾸미는데… 문 첨지가 훈장을 찾아왔다. 훈장은 문 첨지만 보면 곤혹스럽다. 문 첨지 아들 셋이 이 서당을 거쳐 가며 갖다 바친 물심양면의 정성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단 걸 훈장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주지육림 술판에 기생과의 잠자리까지 대접을 받았지만 문 첨지 아들 셋 모두 대과는 고사하고 소과에도 못 미쳐 초시 하나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훈장도 할 말은 있다. 특별과외를 그렇게 시켰건만 머리가 모자라는 걸 어찌하랴! ​ 문 첨지가 이번에 찾아온 건 막내 외동딸과 짝을 지을 그럴듯한 사위놈을 구하기 위해서다. 훈장이 무릎을 쳤다. “안성맞춤이 있소이다 .” 문 첨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훈장 큰 소리를 믿을 수 있어야 말이지” 했다. 허..

그 여인

상주 관아에 불쑥 나타난 한 여인, 딸아이의 아비를 찾아달라 하는데… 상주 관아에 한 여인이 예닐곱살 난 여자애 손을 잡고 나타나 동헌 마당에서 사또를 쳐다보며 하소연을 했다. ​ “쇤네는 7년 전 이곳 상주에서 두어해 살았습니다.” ​ 말을 잇지 못하고 땅만 내려다보고 있어 사또가 “그래서?”라며 용건을 재촉하자 여인이 말했다. “쇤네 딸년 아비를 찾아주십시오.” ​ “딸애 아비라? 아비가 도망을 쳤느냐?” ​ “아닙니다. 쇤네는 그때 만상 객주에서 찬모를 도와 부엌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요.” ​ 사또가 의아한 눈초리로 “그때 잉태를 했다면 출산날에서 역산, 아비를 집어낼 수 있잖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여인이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요” 했다. ​ 옆에 있던 이방이 손..

형제

형 제 새벽녘에 노름판이 파하자 모두가 우르르 노름방을 나와 장터거리 국밥집으로 향했다. 그날이 제천 장날이라 동이 트기 전부터 국 솥이 설설 끓는데 장꾼들보다 먼저 노름꾼들이 국밥집을 채웠다. 한쪽 구석에는 한발 먼저 온 오 처사와 꼽추, 털보 일행이 벌써 국밥을 뜨기 시작했다. 젊은 노름꾼 변 초시가 등을 돌렸지만 오 처사 일행 가까이 바짝 다가앉아, 귀를 세워 오 처사 일행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어찌 그렇게도 끗발이 오르지 않습니까, 어르신?” 호위무사 털보가 목메어 꼽추를 보고 짜증을 부리자 꼽추는 탁배기 잔만 연신 비우며 입을 닫고 있는데, “여보게 끗발은 탓하는 게 아니야” 하면서 젊은 오 처사가 점잖게 털보를 꾸짖었다. 꼽추의 판돈을 쓸어간 변 초시가 속으로 웃었다. 이튿날 밤 황 생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