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묵집 과부와 박 서방

써~니 2023. 5. 2. 12:36

묵집 과부를 마음에 품은 공 초시

어느 날 박 서방과 있는 걸 보는데…

 

밤은 깊어 삼경 때,

공 초시가 사랑방에 홀로 앉아 곰방대로 연신 담배연기만 뿜어대며

시름을 달래고 있다.

그때 애간장을 끊듯이 울어대는 뒷산 소쩍새가

공 초시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3년 전 부인을 저승으로 보내고 탈상도 하기 전에

 

무남독녀 외동딸이 석녀(石女)라고 시집에서 쫓겨나

친정 초당에 똬리를 틀었다.

 

부인이 이승을 하직한 것은 제 명(命)이 그것밖에 안됐고

외동딸이 과부 아닌 과부가 돼 친정살이하는 것도 제 팔자.

요즘 공 초시의 시름은 자신의 신세타령이다.

제 나이 이제 마흔일곱,

아직도 살날이 까마득한데 이렇게 남은 생을 홀아비로 외롭게

살아가려니 앞이 캄캄해졌다.

공 초시는 나이가 젊고 허우대가 훤칠한 것도 아니요,

재산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젊었거나 곳간이 그득 찼다면 벌써 매파가 들락날락했을 터인데

공 초시에게는 곁눈질하는 과부 하나 없었다.

공 초시 집은 보릿고개를 그럭저럭 넘기지만 부자는 아니었다.

중머슴이 하나 있지만, 공 초시가 사랑방에서 헛기침이나 하고

뒷짐 지고 마실이나 다니는 팔자가 되지 못해

머슴과 함께 밭매고 모 심어야 했다.

 

 

바탕 자체야 뚜렷한 것도 아닌 데다 땡볕에 호미질·써레질을 하다보니

얼굴은 까맣고, 주름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켰다.

문제는 새벽녘에 하초가 뻐근해진다는 것이다.

공 초시는 요즘 고갯마루 묵집 출입이 잦아졌다.

탁배기에 묵사발을 먹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묵집 과부에게 눈독을 들인 것이다.

서른여덟살 과부는 빼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수더분하면서도

때때로 눈웃음을 칠 때면 색기마저 풍겼다.

묵 한사발에 탁배기 석잔이면 12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공 초시는 과부의 손목을 잡고 펼쳐진 손바닥에

20전이나 30전을 쥐여줬다.

감자를 캐면 한자루를 메다주고 타작을 하면 나락을 한말 보내주기도 했다.

과부가 고뿔이라도 걸려 묵집 문을 닫고 드러누웠을 때엔

배와 꿀단지를 들고 가 손수 배꿀찜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묵집 과부는 공 초시 애만 태웠다.

 

어느 장날, 산 너머 사는 옛 친구들을 만나

국밥을 안주 삼아 탁배기를 진탕 마시고 헤어져 달을 보고

밤길을 걸어 고개를 넘다 불 꺼진 묵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울타리를 살짝 넘어 뒤꼍에 발을 딛자 안방 들창으로 가느다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절구통을 밟고 서서 들창 안을 들여다보다가

공 초시는 대경실색, 뒤로 넘어질 뻔했다.

박 서방이 묵집 과부와 술잔을 주고받으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또 앞에 공 초시와 묵집 과부가 섰다.

공 초시의 주장은 묵집 과부에게 쏟아 넣은 재물을 돌려달라는 것이고

묵집 과부의 변은 사리로 봐서는 반환을 해야 마땅하지만

손에 쥔 게 없다는 것이다.

사또의 판결은 미뤄졌고 이방이 실사를 나갔다.

며칠 동안 분주하게 쏘다닌 이방이 정보 보따리를 싸 들고

동헌으로 돌아와 사또에게 고한 내용은 이렇다.

공 초시가 서른여덟 묵집 과부에게 공들였지만

술집 과부가 품속에 안기고 싶어한 사람은 박 서방이었다.

박 서방은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황소를 몇마리나 탔던

왕년의 씨름 장사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덩치가 우람했다.

우마(牛馬)장에서 거간이나 하는 박 서방은 항상 주머니가 말라

그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게 묵집 과부였다.

 

묵집 과부는 공 초시한테서 훑어낸 돈을 박 서방에게 바친 셈이다.

하오나 박 서방이 노리는 여자는 따로 있었다.

박 서방은 삼남매를 두고 마누라가 이승을 하직했다.

계모를 들여와야 하는데 기왕이면 예쁘고, 딸린 아이가 없고,

그리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금상첨화.

 

바로 시집에서 석녀라고 쫓겨나 친정에 와 있는 공 초시의 무남독녀다.

박 서방은 밤마다 공 초시네 담을 넘어와 초당의 공 초시

외동딸에게 온갖 공을 들였던 것이다.

금팔찌·옥노리개·은비녀….

공 초시가 쏟아냈던 재물이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 셈이라

송사는 유야무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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