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독립군 집단 학살사건 ◈
조국 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홍범도 장군(1868~1943)이
사망 78년 만에 고국의 품에 안겼어요
지난 15일 제76주년 광복절에 맞춰 유해가 귀환해 왔는데
홍범도 장군은 역사적 봉오동ㆍ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었으며
뒷날 카자흐스탄 고려인 동포들의 정신적 지주였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 독립군사에 "자유시 참변(慘變)"이란
대참사가 있었다는것을 잘 모르고 있어요
그것도 일본군이 아닌 소련군의 앞잡이인 같은민족 공산당에 의해서지요
청산리 전투의 영웅들과 무려 4,000여명의 대한독립군단이 몰살 당한 어마어마한 사건인데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 독립의 주력핵심이 사라지고 일제 강점기 내내 회복능불의 상태가 되었어요
사건의 전말은 이러 했어요
당시 우리 독립군 투쟁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세계 독립운동사상
유례를 찾을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승리를 역사에 남겼어요
외세의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군대가 일본의 정예군과 맞붙어
두번씩이나 대첩을 이룬 역사는 다른 식민지 국가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빛나는 성과 였지요
이미 구한말부터 의병을 이끌고 치열한 전투 경험을 쌓았던 홍범도 장군은
간도국민회 산하 대한독립군 700명을 지휘하여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까지 들어온 일본군을 궤멸시켜 버렸어요
무장 독립군들의 활약이 국경을 넘어 국내에까지 미치게 되자
일본군은 대대적인 추격 군대를 편성하여 간도로 몰려갔지요
당시 봉오동에서는 독립군 연합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어요
홍범도는 일단 봉오동 주민을 대피시킨 다음 일본군 선발대대가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렸지요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 본대가 봉오동 입구에서 선발대대와 합세하여
대오를 정비한후 봉오동 골짜기로 들어섰어요
일본군이 포위망에 걸렸다고 판단한 홍범도는 매복해 있던 병사들에게 일제히 공격 명령을 내렸지요
일본군은 3시간여 동안 저항하다가 퇴각하고 말았어요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 부상자는 300명이 발생했지만
독립군은 전사 4명, 중상 2명에 불과했지요
봉오동 전투 참패에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관동군까지 동원하여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섰어요
그러나 김좌진 장군은 특공대 10여명으로 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많은 정보를 입수했는데
일본군의 토벌 작전을 어느 정도 파악할수 있었지요
교활한 일본군은 영사관에서 30명의 사망자가 난 것을 중국군의 소행으로 몰아 붙였어요
이것은 군대를 중국 영내에 합법적으로 진입시켜 한국 독립군을 토벌하려는 술책이었지요
이 일로인해 일본군은 만주에서 자유로운 무장 활동을 할수 있었어요
그들은 국내군을 북상시키고 시베리아군을 남하시켜 독립군 토벌에 나섰지요
그리하여 5만이 넘는 대병력에 항공대까지 포함시킨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시작 되었어요
장백 삼림의 말미에 있는 지린성의 수림은 울창한 원시림이었어요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은 1차세계대전의 정세 변화로 귀국하는 체코 군대와 협상을 벌여
그들의 무기를 헐값에 모두 사들였지요
체코군으로부터 은밀히 무기를 인수받은 곳이 바로 지린성의 원시림이었어요
오스트리아의 압제를 받고 있던 체코군은 동병상련의 우호감을 실천으로 보여 준 것이었지요
소포(박격포), 수류탄, 중기관총 외에도 많은 양의 탄약을 독립군에게 제공했어요
이 체코의 실탄 80만발이 청산리 전투에서 요긴하게 쓰였지요
중국에 진입한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한국 독립군의 토벌을 강압적으로 요구했어요
그러자 중국군 여단장 '멍프이더오'는 하는수 없이 한국 독립군 부대가 있는 곳으로 진격하는척 하며
은밀히 사람을 보내 한국 독립군에게 지린성을 떠나는 것이 유리하다고 알려 주었어요
그러자 독립군 1,200명과 예비군 1,000명은 장백산 깊은 곳으로 주둔지를 옮겨
훈련을 거듭하며 때를 기다렸지요
드디어 5만의 일본군이 조만간 청산리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독립군도 청산리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기병과 보병이 어우러진 독립군은 180량의 우마차를 거느리고 있었어요
마침내 독립군은 청산리 어구에 들어섰어요
청산리 외곽으로 두 갈래의 큰 길이 있었지요
한 갈래는 중국인 마을로 통했고 다른 한 갈래는 두만강으로 통하는 길이었어요
그 강을 건너면 조국땅 함경북도 무산군으로 갈수 있었지요
김좌진 장군 일행은 골짜기의 높은 곳에 이르러 사방을 바라 보던중
10리너머쯤 광야에서 수십마리의 긴 뱀이 준동하고 있는 것 같은 일본군의 행렬이 보였지요
일본군 제 37여단 기병부대와 야포부대가 합쳐진 대규모 병력이었어요
일본군 육군 소장이 지휘하는 최정예부대였지요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지물을 찾아 신속히 잠복에 들어 갔어요
전위대에겐 최전방 고지를 확보하고 일본군의 동태를 세심히 감시하라는
김좌진 장군의 명령이 떨어졌지요
벌겋게 물들은 저녁노을이 피의 전쟁을 예고하는듯 아름답게 보였어요
어림잡아 일본군 선발대는 1만명은 족히 될것 같았지요
교포마을에 사람을 보내 어린이와 노약자들은 피신케 하고
남는 사람들에겐 독립군이 오합지졸인냥 위장을 하였지요
그리고 지형지물에 익숙한 사냥꾼을 뽑아 적정을 지근거리에서 살피도록 했어요
적정을 살피고 온 결과 적은 삼면을 포위해 압박해 오고 있음을 알수 있었지요
마을에서 독립군이 오합지졸이라는 말을 들었는지
일본군은 기병부대를 앞세우고 대담하게 전진하고 있었지요
이범석이 지휘하는 주력 독립군은 산속에 매복한 채 일본군을 기다렸어요
그들의 눈에서는 불을 뿜을듯 결의에찬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지요
"나의 조국을 짖밟은 원수놈들을 단 한명도 살려둘수 없다"는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일본군이 갑자기 행열을 멈추고 야영을 준비하고 있었지요
맨 앞에 오고 있는 장교는 금줄 견장 네개를 단 소령이었어요
그는 말똥 만지던 손으로 건빵을 먹기도 하고 그러다가 손을 콧수염에 문지르기도 하면서 걷고 있었지요
이범석의 권총은 콧수염 소령의 심장을 조준하고 있었어요
갑자기 콧수염 소령이 오른손을 군도에 대며 왼손으로는 망원경을 잡았지요
그러더니 아주 신중한 걸음으로 점점 독립군의 사정권으로 들어 왔어요
이범석 장군의 총알이 콧수염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600개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지요
일본군은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 오는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우왕좌왕하는 일본군의 머리위로 총알이 비오듯 쏫아졌지요
독안에 든 쥐가 따로 없었어요
백운평 1차 전투에서 일본군은 1,000여명이 전멸하였고 몇명만이 도주 하였지요
광복군 피해는 부상자 포함 수십명에 불과 했지요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일본군은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진지를 구축하며 장기전에 돌입했어요
이때를 틈타 독립군은 주력부대가 산속에 남은 것처럼 위장하고
밤새 120리를 이동하여 갑산촌으로 갔지요
갑산촌에 진지를 구축한 독립군은 한국인 촌락 천수평에 와있는 일본군 제120기병중대를
야음을 통해 기습하여 4명의 도망병을 제외한 중대장 이하 전원을 사살하였어요
이때 상부로 가는 일본군의 정보 문서를 취득하여 19사단 2만의 주력부대가
어랑촌에 주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요
독립군은 전원 옥쇄할 각오를 하고 어랑촌을 향하였어요
독립군이 어랑촌 전방의 마록구 고지에 은밀히 다가 갔을때 일본군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요
그날따라 일본군은 한가한듯 술판을 벌이며 유흥을 즐기고 있었어요
밤을 틈타 독립군의 전 화력을 쏫아 부어 일본군을 섬멸했어요
김좌진의 지휘하에 2주야에 걸친 혈전을 치른끝에 일본군1,0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아군의 피해는 70여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이었지요
이로서 2,200명의 병력으로 5만의 일본의 정예군과 맞서
2,000명이 넘는 일본군을 사살한 청산리 전투는
세계역사에도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한국 독립군사에 길이 빛날 커다란 업적을 남겼지요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쟁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침통한 나머지 대한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단행하면서 ‘간도 참변’을 일으켰어요
독립군에게 식량과 군자금을 대는 단위가 간도의 한인 민간인들이었기 때문에
이 한인 마을을 습격하여 민간인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한 것이지요
그러자 청산리 전쟁을 치른 대한독립군들은 동포의 학살을 피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일제의 영향력이 떨어지는 러시아쪽으로 이동할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서 독립군은 자랑스런 청산리 대첩에 고무되어 흩어져 있던 독립군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지요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도시인 중국령 밀산에서
드디어 흩어져 있던 독립군을 대통합하고 재편성하는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어요
이때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된 조직은 다음과 같아요
1.북로군정서 (서일, 김좌진)
2.대한독립단 (이청천)
3.대한독립군 (홍범도)
4.간도국민회 (구춘선)
5.대한신민회 (김성배)
6.의군부 (이범윤)
7.광복단 (이범윤)
8.혈성단 (김국초)
9.도독부 (최명록)
10.야단 (野團, 김소래)
11.대한정의군정사 (大韓正義軍政司, 이규)
12.군비단 (軍備團, (김백일)
이때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이었고 부총재는 김좌진.홍범도·조성환이었어요
총사령관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이 추대되었지요
여단장에 이청천(지청천), 중대장에 김창완·조동식·오광선 등이 선임되었어요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4,000여명 이었지요
이로서 독립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한독립군단"이 만들어 졌어요
1920년 밀산에서 겨울을 난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초 부대별로 이동을 시작하여
노령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에서 활동 중이던 문창범, 한창해 등의 도움을 받아
만주-소련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연해주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지요
당시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 한창해 등은
소련령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여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하였어요
그러나 이들이 조국을 배신하고 소련군에 붙어 독립군을 섬멸하리라곤 꿈에도 몰랐지요
문창범과 오하묵, 한창해등은 소련군의 앞잡이로 철저한 공산당원이었어요
그러나 청산리 전쟁을 치른 독립군의 김좌진과 이범석은 공산주의자는 믿을수 없다며
이 제안을 거부했으나 대다수 분위기는 소련 영내로 들어가자는 의견이었지요
이에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들은 소련 자유시에 집결하였어요
이곳에 집결한 독립군은 간도지역의 독립부대인 최진동 등의 총군부, 안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 등의 독립군, 서일 등의 북로군정서가 있었어요
러시아 지역의 의병대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임표와 고명수의 이항군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 있었지요
모두 합해 5,000여명의 독립군이 집결했어요
여기에는 고려공산당 소속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 한창해 등도 있었지요
자유시 집결의 궁극적 목적은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어요
또 소련군을 도와 항일투쟁을 벌여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지요
당시 러시아는 혁명 내전 중에 있었고 일본군이 백군(러시아 공산혁명에 반대군대)을 도와
시베리아까지 출병해 있었어요
때문에 러시아 땅으로 넘어온 한국독립군은 부득이 적군(레닌 정부군)의 혁명투쟁에
가담할수밖에 없었고 그들로부터 군량,무기지원까지 받았지요
하지만 적군(레닌 정부군)은 혁명이 어느 정도 진척돼 한인들의 도움이 필요없다고 느끼게 되자
이를 눈치챈 일본군은 적군(레닌 정부군)와 독립군을 이간시키기 시작했어요
1920년 일본은 북경에서 러시아와 캄차카 반도 연안의 어업권 문제를 둘러싼 양국간 어업조약을
맺으면서 그 대가로 러시아땅에서 한인 독립군의 활동을 중지시킬 것을 요구했지요
그러자 러시아는 이를 수용했어요
그리하여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적군(레닌 정부군)과 러시아주재 독립군(문창범과 오하묵)은
마침내 제야강 자유시(현 스보보드니) 주둔 한국 독립군을 포위하고 무장해제령을 내렸지요
대한독립군으로서는 소련군과의 협력관계나 그들의 혁명투쟁을 위해 흘린 피의 대가로 보더라도
무장해제는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조치였지요
마땅히 이를 거부했어요
그 결과 일어난 것이 바로 ‘자유시 참변’이라는"대한독립군 집단 학살사건"이었지요
이 자유시 참변은 일제 치하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최대의 참극이었어요
자유시 참변에서 소련군의 공격으로 한인독립군은 960여명이 전사하고
1800여명이 실종되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잡힌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정확한 전사자 숫자는 자료마다 기록이 달라 정확하지 않지만
4,000명에 달하는 독립군은 그뒤 자취를 감추어 버렸지요
역사 학자들은 모두가 사살된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지요
이 자유시 참변 이후 한인들의 항일무장독립운동은 사실상 그 막을 내리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때부터 소련의 술책은
"조선민족의 독립"보다는 그 당시 남아있던 러시아 극동지역의 백군 잔당 색출과
"한반도의 공산화"가 목적이었던 것이었지요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완전히 와해(瓦解)되었지요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총재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달 후 밀산에서 자결하였어요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많은 독립군은 러시아로 넘어가지 않고 만주에 그냥 잠복하고 있었고
지청천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지요
김좌진은 러시아령 이만까지 갔다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탈출하여 만주로 돌아왔어요
한인공산주의 독립군들이 소련공산당을 끌어들여 동포인 독립군을 공격한
이 비참한 사건을 목격한 이후 김좌진 장군은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었지요
당시 김좌진 장군 등 독립군 지도자들은 ‘공산주의자는 러시아 볼세비키의 괴뢰이며
볼세비키는 대한독립군을 내란 음모에 이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면 가차 없이 숙청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성토했어요
이런 성토가 원인이 되어 교육사업 등으로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며 독립군 재기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김좌진 장군은 고려공산당원 박상실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이 일어났지요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도 결국 공산당원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어요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역시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 연행된뒤 시골 극장의 수위로 쓸쓸한 여생을 마감하게 되었지요
이번에 카자흐스탄으로 부터 장군의 유해가 송환되었는데
그때 강제 이주된곳이 바로 카자흐스탄 이었어요
이 무렵 대통령 이승만이 이끌었던 상해임시정부는 국무총리였던 이동휘 등
모든 사회주의자와의 관계를 끊었고 이후 어떤 공산주의자들과의 연합도 시도하지 않았어요
이리하여 선열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항일무력투쟁으로 스스로 독립하겠다던 꿈은 수포로 돌아갔지요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소련 공산당과 여기에 사주를 받은 한인공산당의 음모 때문이었지요
독립운동 시기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는 가장 큰 원인은 공산당 세력이지요
일치단결해서 싸워도 독립을 달성하기가 쉽지 않은 마당에 먼 시베리아 땅에 가서도
동포인 독립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것이 공산당이었어요
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라는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지요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리지요
그리고 이 참변을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부르고 있어요
다시 요약하면
무사도 정신을 이어받은 정예 일본군을 무참히 섬멸한 대한 독립군!!
독립군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한 막강 대한 독립군!!!
이토록 용감무쌍한 막강 독립군이 한 순간에 몰살을 당하는 어쩌구니 없는 일이 있었으니
이 어찌 우리나라의 불운이 아닐수 없어요
그것은 1921년 6월 28일 일제와 비밀합의를 맺은 소련의 붉은 군대와
그 꼭두각시 이르쿠츠크파 한인 공산당세력이 러시아 아무르주 자유시(스보보드니)에 집결한
상해 임시정부 지지 "대한독립군단"을 몰살시킨 사건이지요
여기에는 소련군의 사주를 받은 문창범과 오하묵,한창해라는 고려공산당원이 주범이었어요
소련군이 몰살시킨 4,000명의 대한독립군단은 청산리 전쟁과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항일무장독립군의 주력이었지요
이 사건 이후 우리나라 무장 독립군은 말 그대로 궤멸되고 말았어요
우리 민족은 1945년 해방될때까지 두번 다시 이런 무장투쟁조직을 갖출수가 없었지요
1921년 6월 궤멸된 대한독립군단은 함경도 지역의 호랑이 포수와
1895년 을미의병, 대한제국 해산군인 등이 주축이 된 백전노장의 무장병력이었어요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때 가장큰 무장세력이 사라진 것이지요
그 이후 1940년대까지 무장 독립군은 전무 하였지요
이로서 청산리 전투 이후 독립군의 활약이 전혀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지요
1940년 광복군이 조직될때 최대한으로 모은 인원이 불과 400명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 당시 광복군의 전투력은 총도 쏠줄 모르는 그야말로 오합지졸에 불과 했지요
이처럼 우리나라 역사에 공산당은 치명적인 걸림돌이었지요
1921년 자유시 독립군 참살에 이어
1950년 6.25 전쟁 발발등
지금까지도 자유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고 있지요
그들은 과연 어느나라 민족이고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다시한번 곰곰히 새겨봐야 할때라 생각이 드네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 *-
▲ 대한 독립군단 지휘부 사진...
▲ 자유시(스보보드니)에 집결한 대한 독립군
자유시 참변과 민족분열의 가장 큰 원인은 조선공산당 ...
▲ 대한 독립군단이 몰살당한 장소...
▲ 대한 독립군 참사를 보도한 독립신문
신문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보도하고 있어요
자유시참변이 없었더라면 우리의역사는 많이 달라질수도 있었다고 하지요 ...
▲ 광복군 창설 ...
▲ 사냥꾼, 농부 , 집시, 히피 등으로 잡다하게 구성된 오합지졸 부대
따라서 유니폼을 입은 병사는 장교나 극소수이며 심지어 맨발도 많았지요
1921년 블라디보스톡의 구소련 붉은군대 12연대
저들의 목적은 백군 잔당 토벌이지만 이미 백군은 와해된 상태였지요
사진상의 저 놈들이 대한독립군단을 몰살시킨 부대중 하나 였어요
▲ 1910년 8월 25일 한일 합병이 양국에서 조인되어 정식으로 선언되었지요
▲ 이 합병에 박차를 가한 것은 하얼빈에서 10개월 전에 일어난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이었다고 하는데
가장 존경할 만한 일본인 정치가를 한국인이 살해한 사실은
한국인이 무법적이며 자제심이 없다는 일본인의 국내 감정을 자극했다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 만일 점진주의적인 이토가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한일합병이 빠르게 행해지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러나 일본정부의 합병 결정은 이미 2년전에 내려져 있었지요
▲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단행한 외면적 이유는 한국의 독립이었다고 했지만
이것은 일본인의 치졸한 술책이었지요
그로 인해 소수의 한국인들은 양국이 합병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기 시작했지요
▲ 한반도 전역에 걸친 반일 의병운동은 한국인 대부분이 일본의 지배에 분개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했어요
그러나 한국인 중에는 일본의 개혁에 감명 받은자도
일본과의 협력이 한국에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 기대하는 자도 많이 있었지요
▲ 이완용 내각은 한결같이 친일파였지만 이완용 자신은 친일조직 '일진회'에 적대적이었어요
이완용은 귀족 출신인 반면 일진회를 이끄는 송병준은 낮은 신분 태생이었기 때문이지요
▲ 송병준은 '지금처럼 보호국으로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현상 보다는
합병을 하면 한국의 행정 정책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지요
일진회의 '이용구'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기본적으로 같은 동족'이라고 주장 하였고
이것은 이후 수년 동안 일본이 한국 정복을 정당화할때 두고 두고 이용 하였지요
그러나 일부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반도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한국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한국인으로선 아주 모욕적인 말이었지요
▲ 일본 정부는 한국을 점령하는 정당성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어요
한국은 군사적 약체였고 근대화에서는 동아시아중 가장 뒤쳐져 있었지요
일본은 자신들이 내미는 근대 문명에 저항하는 한국에 당혹했으며
그것을 전적으로 그들의 무지 탓으로 돌렸지요
▲ 한국의 일본헌병을 대폭 증원한 데라우치 육군대신은 이렇게 말했어요
"미개한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는 경찰보다 헌병이 간편하다"
▲ 가혹한 의병진압이 1909년 9월부터 시작되었지요
많은 한국인이 오늘날까지 품고 있는 일본에 대한 강한 증오는
어쩌면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몰라요
1910년 8월 16일. 데라우치는 이완용에게 합병 조약에 관한 각서를 내밀었어요
한국의 이익을 약속하는 일본의 방침을 들은 후 이완용은 두 가지를 요구했지요
1. 합병 후에도 계속 한국이라는 국호를 남길 것.
2. 한국 황제에게 왕의 칭호를 허용해달라.
▲ 이완용은 원래 합병을 환영했지요
그가 걱정한것은 국호와 왕이 보존되지 않으면 한국의 주체성이 사라진다는 점이었어요
이완용이 생각하는 합병이란
오스트리아-헝가리처럼 양국이 독립국의 형식을 유지한 채 합병하는 것을 의미했지요
최종적으로 국호는 구칭 '조선'.. 황제는 '이왕 전하'가 되었어요
그러나 일본에서 '왕'이란 황족의 하나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지요
▲ 일본 정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서구 열강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일본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고 일본의 세력이 한국에 뻗치는 것을 지지했지요
한국에게 번영을 가져다 준다는 일본정부의 공언을 순진하게 믿었던 일본인들도 자성해야 하지요
일본의 한국 지배는 대륙을 향한 다음 단계 침략을 위한 도약대 기능 말고는
한국에 관심을 기울인 흔적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지요
▲ 합병 조약에서 왕과 귀족의 우대가 강조되었어요
일본은 상류 계급이 만족하는 한 무지한 국민이 불만을 가진다 한들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지요
이와 비슷한 태도는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에서 전형적으로 볼수 있다 했어요
▲ 머지 않아 단순한 '왕'이 될 순종황제는 쇠약 하였고 치아가 없었으며 회복 가능성도 없었지요
황제는 밤낮으로 걱정하며 노력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상황을 수습할수 없었어요
오히려 이전부터 동양평화와 한국인의 생활을 보전할거라고 신뢰해 온
'메이지 덴노(천황)'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지요
▲ 순종황제는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어요
번잡스럽게 소요를 일으키지 말고 차분히 생업에 열중하라.
동시에 일본 제국의 문명화에 복종해서 행복을 누리라.
짐이 오늘날 이런 결정을 내린것은 오로지 그대들 민중을 구하고 싶은 필사적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 일본에 유학중이던 한국의 황태자 '이은'은 더 이상 황태자의 칭호를 쓸수 없었고
'창덕궁의 어린 왕자'라고 칭했지요
메이지 덴노는 난폭하고 소심한 자신의 아들 '요시히토'보다 훨씬 활발한 '이은'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매일 과자와 과일, 각종 장난감등의 선물을 보냈지요
▲ 메이지 덴노는 한국의 황제와 황족에게도 자주 선물을 보내며 예의를 다했어요
놀라운 동양의 예절이지요
그러나 메이지는 합병이 장차 한국의 군주제를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할 것인지는 모르고 있었지요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는 한국의 연호 '융희'의 사용을 금하고 일본 황제의 연호 '메이지'를 따르게 했어요
조선 왕조가 500년 이상 사용한 '한성'은 '경성'으로 개명하였지요
합병 초기 단계부터 벌써 조선인의 국가 의식을 철저하게 파괴한 것이지요
▲ 일부 사람들 특히 상류 계급의 한국인들은 행정의 효율이 좋아지고
일본 통치하에서 그들의 안전이 증진한데 감사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한국인 대다수는 외국인의 통치하에서 매우 불행했어요
일본은 한국인을 열등한 자로 취급하며 나중에는 한국인의 국어와 이름까지 뺏으려 했지요
일본인 대다수는 일본이 대만,사할린,한국까지 통치하에 둔 것을 기뻐하고 자랑으로 여겼어요
일본은 극동에서 홍콩과 두세개의 중국 항구밖에 소유못한 영국과
인도차이나에서 더 진출하지 못하는 프랑스
그리고 필리핀 통치로 골머리를 앓고있는 미국보다 더 큰 성과를 올렸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당시의 일본인 거의 모두는
타 민족을 지배하는것이 얼마나 큰 불행한 일인지
또 그 불행으로 인해 얼마나 큰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지요
'일반계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멸치는 종합 보양제 (0) | 2021.10.01 |
---|---|
? 꼭 읽어보세요!! 암(癌)과 양치질 (0) | 2021.10.01 |
떼놈 짱깨 짱꼴라라 부르는 이유 (0) | 2021.10.01 |
우산 (0) | 2021.10.01 |
★아름다운 오로라 [aurora] (0) | 2021.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