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판

 

마음 씀씀이가 후덕하지만 자식이 없던 선주 이초시 집에

식솔 딸린 선장 진백이 함께 사는데

​조기잡이철 바다에 나갔던 진백이…

선대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은 이초시는 점잖은 선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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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척의 황포 돛배가 만선이 되어 돌아올 때면 소와 돼지를 잡고

술을 독으로 날라 선원들에게 잔치판을 벌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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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초시는 마음 씀씀이가 후덕해 노련한 뱃사람들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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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에 있는 드넓은 이초시집은 항상 사람들로 들끓었다.

별채가 여럿 있어 총각선원들도 살고,

식솔이 딸린 선장도 한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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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살, 다섯살, 일곱살 아들 셋을 둔 용왕호 선장 진백이도 별채에 삼년째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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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초시는 동년배 진백을 워낙 신임해 집사노릇까지 맡겼다.

이초시 부인도 사람이 좋아 선원들을 한 식구처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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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좋고 가문 좋고 재산 많고 인품 좋은 이초시 부부에게 모자라는 한가지는 자식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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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초시는 부인을 끔찍이 사랑해 가끔씩 도매상들에게 이끌려 기생집을 가도 외박하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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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초시 부인은 항상 미소를 머금지만 위엄을 잃지 않고

그 큰 집안 살림을 빈틈없이 꾸려간다. 바깥출입도 없는 이초시 부인의

유일한 낙은 진백의 아들 셋을 데리고 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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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백의 부인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인데다 다소곳하면서도 음식솜씨가 좋아

이초시 부인을 도와 부엌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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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잡이철이 됐다. 진백은 용왕호의 닻을 올려 만선의 꿈을 안고 연평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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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에 본거지를 잡고 산동반도 쪽으로 조기떼를 쫓아갈 때

갑자기 서쪽바다 끝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슬슬 심상찮은 바람이

일더니 곧이어 집채같은 파도가 배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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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용왕호를 본 사람도, 진백이와 선원들을 본 사람도 없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제물포 이초시네 집은 초상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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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백의 부인은 어린 삼형제를 안고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슬픔은 전염돼 이초시는 술과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고 이초시 부인도 눈이 퉁퉁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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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호를 삼킨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고 춘하추동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5년이 흐른 어느 봄날, 이초시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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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호 선장 진백이 돌아온 것이다. 진백이 몸서리치는 기억들을 털어놓았다.

배가 난파돼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보니 부러진 돛을 안고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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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좋게 강진을 떠나 산동반도로 가던 중국배가 그를 건져올렸으나

위해에서 인신매매단에 팔아넘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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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중국에서의 노예생활 끝에 탈출해 꽁꽁 언 압록강을 건너

제물포까지 돌아왔을 땐 5년이 흐른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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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힐 일은 이초시 집에서 또 벌어졌다. 진백의 부인은 아이들을 다섯이나 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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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넷, 딸 하나. 위로 아들 셋은 진백의 핏줄이요, 아래로 둘은 이초시의 씨다.

진백의 부인은 차림새부터 달라졌다. 귀부인이 돼 이초시네 안방을 차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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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만 흘렀다.

이초시네 사랑방에 어른거리는 촛불 아래 졸졸졸

술 따르는 소리만 들릴 뿐 끝없이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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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이렇게 될 줄 나도 몰랐네.” 이초시가 입을 열었지만 진백은 묵묵부답이다.

또다시 정적이 흐르다가 입을 연 사람은 이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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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7년 전 시월 열이틀, 자네 부인은 친정어머니 병환을 돌보러 친정에 갔고

나는 보름 동안 연평도에 갔댔지.” 진백이 술잔을 떨어뜨리며

눈을 왕방울만하게 뜨고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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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처는 열흘 넘게 자네 씨를 받았지만 결국 석녀라는 게 증명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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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초시와 진백의 담판은 간단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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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백과 아들 셋은 이초시가 마련해준 가마를 타고 한양으로 갔다.

종로통에 큰 포목점을 하는 이초시 부인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그들을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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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목점 뒤에 딸린 큰 기와집에서 그렇게도 귀여워하던 진백의 아들 셋을

아이들 방에 잠재우고 부엌에서 목욕을 한 이초시 부인이 술상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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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료에 앉은 진백에게 술 한잔을 올리고 큰절을 하며

“서방님” 말을 잇지 못하고 엎드려 어깨만 들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