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겁탈

써~니 2023. 2. 8. 16:33

외딴집에 이사온 대장장이 ‘곽꺽정’

연장 팔려고 나간 비내리던 밤

말 못하는 마누라만 있는 집에…

 마을 변두리, 냇가 산자락에 외딴 빈집으로 젊은 대장장이 신랑 각시가 이사를 왔다.

빈 외양간에 풀무를 앉히고 대장일을 시작하더니,

장날이 되자 장터 구석에 칼이며 호미를 펼쳐 좌판을 벌였다.

그때 왈패 세녀석이 자릿세를 받으려다 시비가 붙었다.

구경꾼들이 빙 둘러 모여들었는데 일은 싱겁게 끝났다.

‘후다닥 퍽퍽-’ 순식간에 왈패 세놈이 질퍽한 장터 바닥에 여덟 팔자로 뻗어버린 것이다.

 이 일로 대장장이 곽가는 ‘곽꺽정’으로 불리며 저잣거리에서 일약 영웅이 되었다.

그는 이따금 주막에 들러 대폿잔을 기울였는데, 다른 장사꾼이 모여들어 합석해도

그저 껄껄 웃기만 할 뿐 신상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에 대한 궁금증은 모든 사람들의 입을 근지럽게 만들었다.

대장일을 맡기러 간 사람들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로는 곽꺽정의 젊은 마누라는 벙어리로 약간 모자랐다.

하지만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곱게 생겼으며, 신랑을 도와 풀무질에 망치질도 한다는 것이다.

 곽꺽정이 대장일로 만든 연장을 한보따리 짊어지고 외장길에 나선 날,

밤까지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려 개울물 소리만 콸콸 천지간을 울렸다.

그런데 시커먼 어떤 놈이 외나무다리를 건너 대장간으로 쑥 들어갔다.

칠흑 같은 삼경에 산자락 외딴집에서 말도 못 하는 곽꺽정의 마누라는

발버둥을 쳤지만 꼼짝없이 겁탈을 당하고 말았다.

곽꺽정의 마누라는 기절을 했지만, 두번이나 욕심을 채운 그놈은

바지춤을 올리며 ‘흐흐~’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대장간 안방을 나와 외나무다리를 건너자 하지 짧은 밤이 걷히며 어슴푸레 동이 트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자네는 이 밤중에 대장간에 호미 사러 왔는가?” 약재상 오대인이 비실비실 웃었다.

혼비백산해 도망친 겁탈자는 황부자의 개차반 막내아들로,

곽꺽정의 이단옆차기에 맞아 장터 바닥에 고꾸라졌던 왈패 삼인방 중의 하나였다.

 그날부터 황부자 막내아들 장곤은 약재상 오대인에게 코가 단단히 꿰었다.

오대인이 고자질을 한다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인데, 다행히 곽꺽정에게 일러바치지는 않았다.

그래도 장곤은 바짝바짝 피가 마르기 시작했다.

 어느날 밤, 친구들과 주막에 갔더니 주모가 다가와

“도련님, 오대인이 술값을 도련님께 받으라고 합디다”라고 요구했다.

장곤은 꼼짝없이 돈을 갚았다.

어느날엔 술값이 너무 비싸 “아니, 오대인은 술을 얼마나 퍼마셨길래…”라고 툴툴거렸는데,

주모가 씩 웃는 것을 보니 해우값까지 덮어씌웠다.

어디 주막집뿐이랴. 너비아니에 용봉탕 먹은 것은 물론 신발집·포목집에서도 계산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장곤은 아버지 황부자의 금고 다락에 손을 대고, 제 어미 패물에도 손을 댔다.

급기야는 오대인을 죽이고 자신도 죽어버릴까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가 장날 저녁, 장곤은 파장판에 곽꺽정을 모시고(?) 주막으로 갔다.

 “형님, 한잔 올리겠습니다.

” 곽꺽정이 영문도 모른 채 꿇어앉아 술잔을 올리는 왈패로부터 잔을 받아 쭉 들이켰다.

둘이 부어라 마셔라 술이 잔뜩 취할 즈음, 장곤은 지난 일을 실토했다.

“형님! 이제 나를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십시오.”

 그러자 곽꺽정이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고맙네, 자네 덕택에 내 여동생이 정신을 차리고 말문이 열렸어.”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고 있던 장곤은 깜짝 놀랐다.

겁탈한 여인이 곽꺽정의 마누라가 아니라 여동생이었다니….

곽꺽정의 여동생은 두해 전에 시집을 갔는데 첫날밤에 술을 잔뜩 마신 신랑이 신부 배 위에서 복상사하고 말았다. 하도 놀란 신부는 그후로 실어증에다 실성해 곽꺽정이 그 여동생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이 마을로 이사를 온 것이다. 곽꺽정의 여동생과 황장곤은 혼례를 올렸다.

자기도 겁탈하러 왔다가 황장곤이 선수친 걸 알고 방향을 튼

약재상 오대인이 어떻게 됐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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