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묘소를 다녀온 이판윤
그날 밤 어머니와 함께 또 다른 산소를 찾아가 절을 올리는데..
서른셋 젊은 나이에 판윤(조선시대 한성부의 으뜸 벼슬)으로 봉직하는
이서붕이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왔다.
사또와 육방관속이 마중 나와 떠들썩해질까 봐 어둠살이 내릴 때
평상복 차림으로 말고삐를 잡은 하인 한 사람만 데리고 고향집에 들어갔다.
도착하자마자 홀로 지내시는 모친에게 큰절을 올렸다.
“바쁜 공무를 접어두고 어떻게 하경했는고?”
“어머님 문안도 드리고 아버님 묘소도 찾으려고 윤허를 받아 내려왔습니다.”
병풍을 등 뒤로 보료에 꼿꼿이 앉아 계시지만 어머니 얼굴의 주름은 더 늘었고,
머리엔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찬모를 제쳐두고 손수 부엌에 나가
아들이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호박잎을 찌고 강된장을 끓였다.
“언제나 어머님 손맛이 그리웠습니다.”
저녁상을 물리고 새벽닭이 울도록 이판윤은 어머니와 정담을 나눴다.
그리고 이튿날엔 정성껏 마련한 제물을 들고 선친 묘소를 찾아가 절을 올렸다.
그날 밤, 어머니는 삼베 보자기로 싼 작은 보따리와 호리병을 이판윤에게 들려 단둘이 집을 나섰다.
보름달이 환해서 초롱도 들지 않았다.
장옷으로 얼굴까지 가린 어머니는 느린 걸음이지만 들판을 가로지르고 산허리를 돌아
양지바른 산자락에 닿았다. 먼 걸음에 지쳤는지 어머니가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마를 타고 오시지 않고….”
이판윤의 걱정에 어머니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한숨만 쉬었다.
그들 뒤로 잡초에 파묻힌 나지막한 봉분이 쓸쓸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누구 묘소인지 묻지 말고 술을 따른 뒤 절을 올리거라.”
삼베 보자기를 풀자 고추전 한판에 찐 닭 한마리가 나왔다.
이판윤이 술을 따르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어 무릎을 꿇어 절을 세번 올렸지만 일어설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장옷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모자(母子)는 말 없이 집으로 돌아왔고, 이판윤은 간밤의 일에 대해 한마디도 여쭙지 않았다.
32년 전, 이진사의 부인은 친정조카 혼례에 갔다가 사흘 만에 시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장맛비에 개울물이 불어나 걸음을 멈춰야 했다.
개울 디딤돌이 싯누런 황토물에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그때 어렴풋이 회나무 옆에 세칸짜리 고서방 집이 보였다.
드넓은 들판은 거의 이진사네 논밭이고, 이를 관리하는 마름이 바로 고서방이다.
이진사 부인이 고서방 집에 들어가 툇마루에 앉자 논에 물꼬를 터주던 고서방이 바로 달려왔다.
앞뒤 사정을 듣고 난 고서방이 자신 있게 말했다.
“마님, 제가 월천(越川·내를 건넘)시켜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개울가로 나왔을 때 장맛비는 장대같이 쏟아지고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고서방이 등을 내밀자 멈칫거리던 마님이 뻘쭘하게 업혔다.
으르렁거리는 개울로 성큼 들어서자 고서방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있던 마님은
등에 바짝 붙어 양팔로 고서방의 목을 감쌌고, 고서방은 양손으로 마님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황토물이 고서방의 허리춤까지 차오르는데 아직 개울의 절반도 건너지 못했다.
“그만 돌아 나가세.”
놀란 마님이 소리쳤다. 날은 저물고 두 사람은 고서방 집으로 되돌아갔다.
추위에 떨던 마님은 젖은 옷을 모두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날이 새면 불지옥으로 떨어진다 해도 그날 밤을 그대로 넘길 수는 없었다.
열달 후에 이진사는 그렇게 기다리던 외동아들을 얻었다.
'야담, 야설,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명기(名技)들의 시(詩)음미해 보세요! (1) | 2023.02.19 |
---|---|
내 것이 아닙니다...📑🏃 (0) | 2023.02.18 |
파혼당한 예진아씨 지혜 (0) | 2023.02.13 |
돌아야 돈이다 (0) | 2023.02.11 |
겁탈 (0) | 2023.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