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주모의 기둥서방

써~니 2023. 3. 22. 15:42

주모의 기둥서방

주모가 갈림길에 섰다.

기둥서방을 들일 건가 말 건가?

서로 장단점이 있다는 걸 주모는 잘 알고 있다.

장점은 대충 이렇다.

사람들이 과부라고 깔보지 않는다.

 엿장수고 갓장수고,

 늙은 놈이나 젊은 놈이나,

 양반이나 상것이나

 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양물을 찬 놈들은 과부 치마 벗길 궁리만 한다.

 술에 취해서 주막이 파한 후에

 안방으로 쳐들어오지 않나,

 곰방대에 불 붙인다며 부엌에 들어와

 술상 차리는 주모의 치마 밑으로 손을 넣지 않나….

 든든한 기둥서방이라도 있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술 처먹고 밥 처먹고 나서 돈 없다고

 치부책에 외상 달아놓으라고

뻔뻔스럽게 나오는 놈들도 부지기수다.

 해가 바뀐 외상도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 놈들이

 어깨가 떡 벌어진 기둥서방이

 치부책을 코앞에 펼치면

 전대를 풀든가 물납이라도 한다.

국밥을 한참 먹다가

 제 머리카락을 국밥 속에 넣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새 국밥 가져오라 떼쓰는 놈,

 술 두잔을 따르니 호리병이 바닥났다고 깽판치는 놈들도

 기둥서방의 고함에 쑥 들어간다

. 장작도 패고 구석구석 소제도 하고

지붕 고치는 것도 기둥서방 몫이다.

이런 장점이 있지만 단점도 만만찮다.

 주막집 주모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는

임도 보고 뽕도 따는 것이다.

 바로 하룻밤 운우의 정을 나누고

해웃값도 챙기는 것.

온종일 눈물 흘리며 아궁이에 불 지펴

 국 끓이고 밥해 상 차려내고,

고두밥 쪄서 누룩과 버무려 탁배기 걸러내 팔아도

 늦은 밤 호롱불 아래서 계산을 해보면 별것이 없다.

 땀 흘린 품값을 제쳐 놓더라도

 매상고에서 재료비를 빼고 나면 한숨만 나온다.

그런데 남정네와 하룻밤 자고 나면

 재미는 재미대로 보고

 재료비 한푼 안 들어간 해웃값은

 고스란히 알돈이다.

허나 기둥서방이라고 들여놓으면

그 짓을 할 수 없다

. 또 하나,

기둥서방은 기둥서방일 뿐인데

이게 주인행세를 하며

 친구들을 데려와 공짜 술을 주거나

 돈통에 손을 대기도 한다.

청풍 나루터 주막.

 서른 아홉살 주모는

 아직도 박가분을 바르면

 눈 밑의 잔주름을 감추고

 처녀까지는 몰라도

청상과부 행세는 할 수 있는데,

 한해 전에 왈패들 등쌀에 못 이겨

 홀아비 우 서방을 기둥서방으로 맞아들였다.

지난 단옷날,

 씨름판에서 황소를 타고

 친구들과 함께 주막으로 들이닥쳐

 술 한독을 다 비우고

 호탕하게 웃어 젖히는 게 너무 멋있어

주모가 먼저 꼬리를 쳐서

 우 서방을 안방으로 끌어들여 호롱불을 껐다.

 그 큰 덩치로 꾹꾹 누르는 통에

 주모는 세번이나 숨이 넘어갔다.


이튿날부터 우 서방이 안방을 차지하고

 가끔 문을 열고 큰기침을 하니

조무래기 왈패들이 얼씬도 못했다.

 우 서방은 부러진 평상 다리도 고치고

 수챗구멍도 치우고

 밤이면 주모를 기절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이렇게 여섯달을 착한 기둥서방으로 보내더니

 여섯달이 지나자

저잣거리 건달생활이 그리웠던지

주막을 나가 쏘다니기 시작했다.

노름판에 매달려 열흘씩 집을 비우고

가뭄에 콩 나듯이 주막으로 와도

 곤드레만드레 쓰러져 코를 골아,

부엌에서 뒷물하고 온 주모를 뚜껑 열리게 했다.

외상값 받아서 노름판으로 직행하는 일도 생겼다.

우 서방이 타지로 원정도박을 갔다가

보름 만에 주막으로 돌아올 때 새벽닭이 울었다.

안방 문을 열자 주모는 발가벗은 채 이불로 몸을 감쌌고,

 어떤 놈이 옷을 옆구리에 찬 채 튀는 걸 우 서방이 낚아챘다.

불을 켜고 보니 약재상을 하는 부자 홍 첨지였다.

우 서방과 홍 첨지가 탁배기를 주고받으며

 흥정을 시작했다.

 홍 첨지가 백냥부터 시작해 천냥까지 올렸으나

 우 서방은 팔자를 고치겠다는 듯이

 삼천냥을 요구했다.

 결국 세사람은 사또 앞에 서게 됐다.

 주모가 ‘친정아버지 보증빚 갚으려고 허리띠를 졸라매는데

 기둥서방은 외상값을 받아 노름판에 간다’고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한 게 먹혀들었다.

 사또의 판결은 이랬다.

“기둥서방의 본분을 망각한 우 서방은

 홍 첨지의 멱살을 잡을 권한이 없다

. 주모로부터 기둥서방 직책에서 해고됐으니

 앞으로 주막 출입을 금한다.

그리고 홍 첨지는 주모에게

해웃값으로 천냥을 지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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