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못 믿을 건 여자?

써~니 2023. 3. 26. 12:17

 

못 믿을 건 여자?

한 초시는 또 과거에 낙방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삼십리 밖 천석꾼 부자

 조 참봉 댁 집사로 들어갔다.

 쓰러져 가는 초가삼간에 신부 혼자

남겨 두기 뭣해서 늙은 이모님을 불러다

 

 함께 지내도록 했다. 한 초시가 하는 일이 고되지는 않았다.

조 참봉의 서찰을 대필해 주고

 장부를 만들어 소작농들을 관리하고

곳간의 재고를 기록하는 정도다.

 한달에 집에 갈 수 있는 사흘을 빼면

나머지 날들은

 조 참봉 댁 행랑채에서 잠을 잔다.

월말에 집에 갈 땐

 구름을 타고 바람에 흘러가는 듯 하지만

아리따운 새 신부와 꿀 같은 사흘을 보내고

 조 참봉 집으로 돌아올 땐

 

천근만근 발길이 무겁다.
조 참봉의 생일날 친척과 친구들이 모여들자

 산해진미가 상다리가 휘어져라 상에 올랐다.

 행랑채 호롱불 아래서 한 초시도

 푸짐한 저녁상을 받았다.

 

술을 몇잔 마시고 수저를 들다

 한 초시는 그만 목이 콱 잠겼다.

 상에 오른 쇠고기 산적과 문어, 조기를 보니

 늙은 이모와 마주 앉아 겉보리 나물죽을 먹고

 있을 새 신부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다.
집에 가려면 아직 보름이 남았지만

한 초시는 유지를 펼쳐 놓고

 

상에 오른 음식을 싸서 그대로 집으로 갔다.

살며시 사립문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었더니,

 이럴 수가! 그 조신하던 새 신부가 벌거벗은 채

죽은 듯이 누워 있고 간부(姦夫)는

 상의를 벗은 채 바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한 초시는 낫을 치켜들고

 간부를 내리치려다가 멈췄다.

 

간부는 달빛에 번쩍이는 낫을 보고는

 목을 감싸 쥐고 머리를 처박았지만

 새 신부는 희멀건 아랫도리를 그대로

드러낸 채 기절한 듯 꼼짝하지 않았다.

 한 초시는 털썩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내 탓이로다.

 

집안이 넉넉했으면

 새 신부를 혼자 두지 않았을 것을….”

 한 초시는 대성통곡하다가 시퍼런 낫을

 간부의 목에 대고 말했다.

 “네놈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단, 한가지 조건이 있다.

내 색시를 데려가

한평생 호강시켜 줄 수 있겠느냐?

 

” 간부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예…예. 틀림없이 언..언약을 지키겠습니다.”
춘하추동이 왔다가 사라지고 십년 세월이 흘렀다.

 나이 든 귀부인이 열살쯤 된 남자아이

 손을 잡고 영월 동헌 대문을 지키는 포졸에게

 현감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현감 앞에 선 귀부인이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무술년

유월 보름날 밤 달빛이 밝았지요.”

 

귀부인의 첫마디에 영월 현감은 얼어붙었다.
얘기는 이렇다. 주색에 빠진 개차반 청년이

 한 초시의 새 신부 미색에 반해 온갖 궁리를 하다

 새 신부와 함께 사는 한 초시의

늙은 이모에게 돈주머니를 쥐여 줬다.

개차반이 돈과 함께 준 미약을

감주에 타서 새 신부가 마시게 하고

이모는 도망친 것이다.

귀부인이 얘기를 이어갔다.


개차반 젊은이가 정신을 잃고 자는

새 신부의 옷을 벗기고 자신도 옷을

막 벗으려던 때 한 초시가 들어왔습니다.

절대로 교접하지 않았다 합니다.”


그 개차반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자

 새 신부를 깨워 집으로 데려가 제 어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어미가 말했다.

 “한 초시란 분은 의인이다.

 

너는 새 신부에게 절대로 손끝 하나 댈 수 없다.

이 시각부터 새 신부는 나의 딸이다.”
귀부인은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못난 내 아들놈은

 각성하여 삭발하고 출가를 했습니다.

 

” 새신부는 그때

 한 초시의 씨를 받아 둔 몸이었다.

귀부인이 함께 온 달덩이 같은

 아이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께 인사를 올려라.

” 영월 현감은 뛰어 내려가

 아들을 꼭 껴안고 눈물만 흘렸다.

못 믿을 게 여자라며 영월 현감은

 그때까지 재혼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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