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저승 사기꾼

써~니 2023. 4. 14. 16:35

우 처사가 죽었다.

일찍이 부인을 여의고 슬하에 자식도 없이

홀아비로 살다가 며칠 앓아눕더니 속절없이 이승을 하직한 것이다.

우 처사는 학식이 높고 주역에도 통달해 동네 까막눈들 제문을 써주고

입춘첩도 써주었고 때때로 사주도 봐주고 택일도 해

인심을 잃지 않아서인지 이집 저집에서 밥을 해오고

술이 들어와 제법 상가 분위기가 익었다.

친구들이 상복에 두건을 쓰고 상주 노릇을 했다.
입관을 해서 병풍을 쳐 놓고 친구들은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는데 밤이 깊어지자 모두가 쏟아내던 말도 끊어지고

뒷산 소쩍새만 애타게 울어댔다.

바로 그때, 병풍 뒤에서 탁탁탁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가느다란 음성이 흘러나왔다.

밤을 새우려고 앉아 있던 친구들이 모골이 송연해져

병풍을 홱 잡아채자 관 속에

“나 돌아왔어.”

명주실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관 뚜껑을 열자 칠성판 위에서 죽어 누워있던

우 처사가 슬며시 일어났다.

친구 서넛은 기절하고 간이 큰 사람들은 사색이 돼 벽에 등을 붙이는데,

우 처사는 관에서 나와

“목 마르네. 술 한잔 주게.”

이 초시가 사시나무 떨듯이 탁배기에 한잔을 따르자

단숨에 마시고는 얼굴의 땀을 닦았다.

이튿날 우 처사네 초가삼간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 처사의 구수한 입담으로 저승 갔던 얘기가 쏟아져나오자

모두가 귀를 바짝 세웠다.
여러 얘기 끝에

“저승사자가 명부를 보여주는데,

이상한 것은 내년 춘삼월에 임 생원 아들이 저승으로 가게 돼 있더라고.”

일제히 탄식과 동시에 임 생원에게 시선이 쏠렸다.
임 생원은 사색이 되어 털썩 주저앉았다.

우 처사의 얘기가 이어졌다.

“내가 저승사자한테 따졌소.
왜 그 착한 애를 데려가려는 거요? 했더니

‘인명은 재천이오’라는 쌀쌀한 대답뿐이라 저승사자 도포자락을 잡고

살릴 방법을 알려달라고 매달렸소.”

우 처사가 하늘을 보고 한숨을 토했다.

“저승사자 왈,
‘운명은 열여덟살 임 생원 아들에게 정해진 게 아니라

내년 춘삼월에 그와 혼례를 올릴 민 서방네 딸에게 있네."

"그해에 청상과부가 될 운명이니 그 신랑은 죽는 게 당연하지.
둘다 탈이 없으려면 민 서방네 딸은 갑자을축…
쉰세살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 해’ 이러는 거야 글쎄.”

임 생원과 민 서방은 앞뒷집에 사는 죽마고우다.
두집 다 가난하지만 보릿고개에도 장리쌀을 빌리지 않고

넘어갈 만큼 착실하다.

두사람은 결혼해서 각각 아들을 낳고 딸을 낳자

사돈을 맺기로 약조를 했으니,

뒷집 아들과 앞집 딸은 소꿉장난할 때 약혼을 한 셈이다.

둘은 자라면서 앞집 딸은 인물이 빼어났고

뒷집 아들은 훤한 장부가 됐다.

내년 봄, 혼인날을 잡아 놓은 처녀 총각은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걷듯이 가슴이 부풀어 올랐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임 생원과 민 서방은 주막에서 밤새도록 울면서

술잔을 기울이다 결국 파혼을 했다.

정이 담뿍 든 처녀 총각도 두손을 맞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임 생원 아들은 보부상들을 따라 돌아올 기약 없이 고향을 등졌다.

민 서방은 저승사자가 우 처사에게 일러준

쉰세살 영감님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어느 날,
우 처사가 민 서방을 찾아왔다.

“여보게 민 서방, 천석꾼 부자 황 참봉이 쉰셋이네.
심덕도 좋은데다 아직도 몸이 장골이네.
자네 딸이 화를 면하려면….”

민 서방은 버럭 화를 냈지만

우 처사의 끈질긴 설득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 참봉은 쉰세살 해가 가기 전,

시월상달에 꽃처럼 피어나는 민 서방 딸을 데려가기로 했다.

사주단자에 문전옥답 열마지기 땅문서를 담아 민 서방에게 보냈다.

황 참봉이 허 의원을 찾았다.

“허 의원, 값 따지지 말고 양기에 좋은 약 지어주시오.
시월상달에 내가 둘째 첩을 들인다는 거 허 의원도 알지요?”

이튿날부터 황 참봉은 산삼 녹용 사향 우황으로 지었다는

한약을 달여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 해구신 육포를 밥 먹듯이 먹으며

첫째 첩에게도 발길을 끊었다.

몸에 좋고 정력에 좋다는 것만 먹었으나 삼년이 지난 유둣날,

여섯달을 누워지내던 황 참봉이
결국 죽었다.

첫째 첩이 정처 없이 떠나고 둘째 첩인 민 서방네 딸도

살림을 정리한 후 자취를 감췄는데

어느날 민 서방네 딸은 나루터 주막에서 보부상 임 생원 아들을 얼싸안았다.

이튿날 아침, 보부상 총각은 깜짝 놀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처녀였다.

우 처사와 허 의원이 짜고 허 의원은 황 참봉에게

양기를 돋워주는 약 대신 양기를 죽이는 약을 계속 지어줬고,

사기꾼 우 처사는 황 참봉으로부터 중매비로 거금을 받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졌었다.

그후 우처사는 200여리 떨어진 어느 마을에서

또 죽는 연기를 하다가 관속에서 질식사하여 저승 가서 황 참봉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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