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잖은 고 진사는 평생 화내거나 다투는 일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오장육부가 뒤집혔다.
겨울이 되자 해소천식이 심해진 고 진사는
사십리 밖 황 의원을 찾아가 약 한첩 지어
집으로 가다가 문득 딸 생각이 나서 발길을 돌렸다.
십리만 더 가면 재작년에 시집간 맏딸 집이다.
오랜만에 딸도 보고 사돈댁 살아가는 모습도
볼 겸 고개 넘고 물 건너 막실 맏딸 집으로
한걸음에 내달았다.절구를 찧던 딸이
눈이 왕방울만 해져서“아버지, 어인 일로…”
하고 달려나온다. 바깥사돈도 사랑방에서 나와
고 진사의 두손을 잡는다.
“이렇게 불쑥 찾아뵈어 죄송합니다,사돈어른.”
“별말씀을…. 어서 사랑으로 들어갑시다.”
사랑방에 좌정하자 사돈이 문을 열고 외쳤다.
“아가, 술상 좀 봐 오너라.”
맏딸이 한참 만에 술상이라고 들여오는데
반되짜리 호리병에 안주라고는 깍두기 한접시에
말라붙은 새우젓뿐이다. 민망해진 사돈이
문을 열고“아가, 닭 한마리 잡으려무나”
하고는 술을 따른다. 술잔이 종지라
가양주려니 했는데 막걸리다.
이번엔 사돈이 직접 부엌에서 사발 두개를
들고 와 막걸리를 따르는데
딱 두사발에 호리병이 바닥났다.
고 진사가 꾹 참으며 말했다.
“술 한잔이면 됐습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사돈이 사랑방에서 나갔다.
속이 뒤틀려서일까.고 진사가 급히 뒷간에
가서 앉았는데 사돈과 맏딸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린다.“아가,내가 잡을게.
그 부지깽이 다오 하자 맏딸년 하는말이
정말….“아버님, 씨암탉 열두마리와
저 송아지는 제 혼수로 가져온
은비녀를 팔아서 사다가 키운 겁니다.
절대로 못 잡습니다.”
사돈이 힘없이 말했다.“알았다.”
고 진사가 사랑방으로 돌아가 곰방대에 불을
붙이려고 부싯돌을 치는데 맏딸년이 들어왔다.
“아버지, 동짓달 짧은 해에 밤길이 걱정입니다.
가시다가 허기지면 이거 드십시오.”
고 진사는 사돈이 팔을 잡는 것도
사양하고 곧장 사돈댁을 나와 딸년이 싸준
삶은 감자 세알을 개울에 던져버리고
주막에 들어갔다. 막걸리 세병을 마시고 대취해
집에 다다랐을 땐 삼경이 가까웠다.
보름이 지나 동짓달도 기울어지는 그믐날,
막실 맏딸이 부친상 부고를 받았다.
맏딸은 부고를 가지고 온 머슴 억쇠를 잡고 물었다.
“아버지가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소?”
“약을 달여 드셔도 해소천식에 차도가 없더니
마침내 지난밤 사경 녘에 피를 토하고
이승을 하직하셨습니다요.”
억쇠가 훌쩍이자 맏딸도 처마 밑에 퍼질러 앉아
대성통곡을 하더니 장옷을 걸치고 억쇠를
따라 친정집으로 향했다.
“아이고 우리 아버지~.”
맏딸은 친정 동네 들어서면서부터 섧게 섧게
울어대더니 병풍이 둘러쳐진 빈소 앞에선
곡소리가 애간장을 녹인다.
“아버지 드리려고 담아놓았던
오미자술을 씨암탉백숙 안주로
그렇게 맛있게 드시더니 보름 만에
이게 무슨 변고입니까, 아버지~.”
맏딸의 곡은 이어졌다.
“그토록 유하고 가시라고 잡았건만
이렇게 가시다니, 아버지~. 몰게골
논 다섯마지기를 제게 주신다 해놓고,
감골 밭 세마지기도 제게 주신다 해놓고….”
바로 그때다. 쾅! 병풍이 넘어지더니 죽었다던
고 진사가 고래고래 고함치며 뛰쳐나왔다.
“야 이년아! 네가 언제 씨암탉을 잡고
오미자술을 내놓았으며 내가 언제….”
“제가 거짓말한 것이나 아부지가 거짓말하신
것이나 오십보백보이니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맏딸은 바로 뒤돌아서 시집으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도 늙은 호박 한덩어리와
깨 한되,다듬잇방망이 하나 훔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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