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고추 한배 다먹었네

써~니 2021. 8. 26. 16:29

 

 

고추 한배 다먹었네

삼남 일원에 여름 내내 비가 오고

역병이 돌아 고추 농사가 폭삭 망했다.

 

배짱 좋고 눈치 빠른 허탁은

돈보따리를 싸 들고 경상도 영양 땅으로

내달려 가 닥치는 대로 고추를 사 모았다.


김장철이 다가오자 우마차 스물여섯대에

바리바리 고추를 싣고 영덕으로 가

배 한척 가득 채워 남해를 돌아

서해로 올라와 마포나루에 정박했다.

 

단판에 고추를 풀지 않고 감질나게

야금야금 풀며 시장 동향을 살피자

고추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허탁의 입이 귀에 걸렸다.

밤이 되자 허탁은 장안의 명기

일엽홍이 기다리는 상춘관으로 달려갔다.

 

열일곱 일엽홍은 얼굴은 절색이요,

가무음곡은 팔도강산에서 따를 자가 없었다.

 

산삼주에 송이·전복 안주를 시켜

밤새도록 마시고 술값을 듬뿍 쥐어 줘도

일엽홍은 치마를 벗지 않았다.

 

허탁이 돈을 물 쓰듯 해도 일엽홍은

바짝바짝 애만 태우고 몸을 허락지 않았다.

 

열두칸 기와집을 사주고 머리를 얹어

주겠다고 해도 일엽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다시는 이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리다."


허탁이 문을 박차고 나가자

주모가 버선발로 달려 나오고 일엽홍은

마루 기둥을 잡고 서럽게 울어 허탁은

다시 신발을 벗고 올라갔다. 그날 밤,

허탁은 주모가 차려 준 별당 신방에서

일엽홍의 치마를 벗겼다.

 

숲은 무성하고 옥문은 좁았다.

일엽홍도 불덩어리가 되어 두사람은

광란의 밤을 보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일엽홍은 부끄러워

불도 못 켜게 하더니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탁이 왜 우느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깨니 동창이 밝았다.

허탁은 감격했다.

 

요 위에 선홍색 핏자국이 선명했다.

일엽홍은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꿀물을 들고 들어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허탁은 상춘관에서 살고 허탁의 집사는

돈보따리를 들고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어느 날, 집사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했다.

 

“대인 나리,고추를 다 팔았습니다.”
“돈은?“모두 대인께 갖다 드렸습죠.”


그날부터 주모와 일엽홍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주모는 별당의 방을 비워 달라 하고

 

일엽홍은 자기 살림살이를 챙기러 왔다.

 

허탁이 마지막으로 일엽홍의 허리를

안았지만 그녀는 쌀쌀하게 손을 뿌리쳤다.

 

허탁이 긴 한숨을 쉬고 “내 양물은

너의 음호를 무수히 봤지만 내 눈은 한번도

못 봤으니 마지막 소원 한번 들어다오.”

 

일엽홍은 그것마저

거절할 수 없어 치마를 걷어 올렸다.

 

허탁이 시 한수를 읊었다.


양쪽의 두 입술에
이빨 하나 없는데
그 매운 고추 한 배를
혼자 다 먹어 치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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