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신관 사또가 부임했다

써~니 2022. 10. 12. 16:37

신관 사또가 부임했다.

훤한 신수에 긴 수염, 꽉 다문 입에 위엄이 서렸다.

지방 토호들이 환영 연회를 옥류정에서 질펀하게 열었다.

열대여섯살 동기들도 있었는데 사또는 굳이 기생들이 이모라 부르는 옥류정

여주인을 수청 기생으로 지명했다.

“사또 나으리, 쇤네는 나으리를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어리고 예쁜 아이들이 수두룩한데 이

 늙은 쇤네를 부르시는 것은 쇤네를 놀리시는 거지요.”

사또는 막무가내였다.

사실 옥류정 여주인은 나이가 서른하나로, 이팔청춘은 아니지만 우아한 자태에 지적인

얼굴이라 한량들이 한번쯤 품어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여주인은 신랑도 없으면서 한번도 몸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허나 어느 명이라고 거절하랴. 그날 밤, 주연을 파하고 안방에 들어가 사또는

이모 배 위에 객고를 풀었다.

그 뒤로 한참 지난 어느 날, 평상복 차림을 한 사또가 갓을 푹 눌러쓰고 밤중에 류 의원을 찾았다.

“사또께서 이 밤중에 어인 일로?”

 

사또가 손가락으로 입을 막았다.

사또와 류 의원은 연회에서 첫 인사를 나누고 보약과 장수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눈 구면이다.

한의원 문을 닫은 뒤 단출한 술상을 가운데 놓고 사또가 오만상을 찌푸린 채 바지를 벗었다.

류 의원이 촛불을 들고 사또의 사타구니를 보더니

 

“매독입니다.”
“허억! 멀쩡해보이던 년이….”

 

사또 눈에 핏발이 섰다.

류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나으리 옥류정 이모가 범인은 아닙니다. 매독은 잠복 기간이 한달인데 그날 연회는 불과

 이레 전이잖아요.”
“한달 전이라~. 제물포의 그년이구나!”

 

사또의 한숨이 구들장을 뚫을 듯 깊었다.

류 의원이 명나라 때 매독 얘기를 꺼냈다.

“진시황이 그 먼 옛날 국력을 쏟아부어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북방 오랑캐, 몽골에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지요.”

만리장성도 별 소용이 없었다.

천년 넘게 몽골은 장애물 넘듯이 장성을 넘어와 중국을 약탈하다가 마침내 칭기즈칸이라는

걸출한 호걸이 나타나더니 아예 중국을 점령, 원나라를 세웠다.

절치부심하던 중국 한족이 주원장을 앞세워 몽골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워 몽골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나라를 되찾은 한족은 몽골이 언제 또다시 세력을 키워 쳐들어올지 몰라, 아예 몽골의

씨를 말리기로 작정했다.

명나라 관리들은 몽골 젊은이들에게 엄청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말을 길러 팔아서는 역부족이었다.

세금을 미납하면 혹독한 형벌을 내렸다.

몽골 젊은이들은 라마사원으로 들어가 붉은 가사장삼을 입고 승려가 돼 세금을 피했다.

교활한 명 관리들은 몽골 젊은이들을 사원에 몰아넣고서 라마사원 앞에 색주가를 차려 놓고

명나라 유흥가에서 매독 걸린 작부들을 모아 그곳으로 보냈다.

구도를 하러 중이 된 게 아니라 세금을 피해서 절로 들어온 혈기방장한 젊은 몽골인들이

코앞의 색주가를 못 본 체할 수는 없는 일. 젊은 승려들은 하나같이 매독에 걸렸다.

그래 놓고는 라마 승려들에게 초야권(初夜權)을 줬다.

시집가려는 처녀는 먼저 승려에게 첫날밤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몽골의 새신부는 매독을 안고 신랑 품에 안겼다.

아이를 사산하고, 아니면 병신자식을 낳았다.

몽골 인구는 파도에 씻겨가는 모래톱처럼 급감하기 시작했다.

류 의원의 얘기를 듣고 난 사또는 공포에 휩싸였다.

약을 지어 사또를 보내고 나서 류 의원이 혀를 찼다.

 이 고을 백성을 다스리러온 사또가 매독을 퍼뜨리는 꼴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한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옥류정 여주인이 찾아왔다.

매독이었다.

류 의원은 곧바로 사또를 찾아갔다.

포졸들이 옥류정에 들이닥쳐 여주인을 잡아다가 옥에 가뒀다.

매독을 퍼뜨리지 않기 위해서다.

이게 웬일인가?

열흘도 안돼 점잖은 이 진사가 류 의원을 찾아왔다.

매독이었다.

류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 사또 환영 연회 때 옥류정 여주인을 사또가 수청 기생으로 지명하자 류 의원 맞은편에

앉았던 이 진사가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류 의원이 이 진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사또에게 얘기하면 이 진사도 옥살이를 해야 하오. 매독을 퍼뜨리지 않게! 옥류정 여주인과

 합방한 후에 부인과 접했소?”
“절대로 합방한 적이 없습니다.”
“진짜 교접하면 안됩니다!”
“약속하겠습니다.”

이 진사는 약을 타서 울상이 돼 돌아갔다.

그런데 보름도 안돼 이 진사 부인이 찾아왔다.

매독이라는 류 의원의 진단에 털썩 주저앉던 부인이 부리나케 달아났다.

류 의원은 이 진사의 거짓말에 이를 갈았지만, 이 진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 진사와 부인 사이에는 연결고리 두개가 있었다.

하녀 삼월이와 마당쇠 칠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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