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서른여섯 옥실댁

써~니 2022. 10. 21. 17:22

 

서른여섯 옥실댁

시어머니 삼년상을 치르고 탈상을 하고 나니

덩그러니 빈집에 옥실댁 혼자 남게 됐다.

상복을 태워 한줌 재로 바람에 날려 보내고 오랜만에

치마저고리를 입고 거울을 보니 꼴이 말이 아니다.

 

지난 세월이라야 서른여섯 해밖에 안됐지만 걸어온 길이 서글펐다.

친정은 원래 양반 대갓집이었는데 아버지가 숙환으로 드러눕자 가세가 기울어졌다.

살림살이가 바닥나고야 아버지는 이승을 하직했다.

 

외상 약값을 갚느라 온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돈벌이를 할 때

옥실댁은 500냥에 팔려 시집을 갔다.

마방집 맏아들 마 서방과 가시버시가 됐다.

옥실댁은 이제 고생이 끝나려나 했는데, 이 마 서방이란 작자가 칠칠하지 못했다.

 

새 신부 옥실댁을 술집 작부 다루듯이 함부로 대했다.

그런가하면 툭하면 가출해 한두달 만에 불쑥 나타나

문전옥답 팔아서 또 어디론가 사라졌다.

시아버지가 죽자 마 서방은 마방을 팔아치웠다.

큰돈을 수중에 넣자 오랫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또 돈이

다 떨어졌는지 5년 만에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집을 팔아치우자 오갈 데 없는 옥실댁은 보따리

하나 옆에 끼고 그것도 신랑이라고 그를 따라나섰다.

산 넘고 물 건너 해 저물면 주막에서 자고 이레 만에 강변마을에 닿았다.

천석꾼 부자 유 진사네 집으로 들어갔다.

마 서방은 행랑채에 방을 잡고 새로 들여온 말을 길들이고 있었다.

마방집 맏아들로 자라며 어릴 적부터 말 다루는 솜씨를

익혀 마 서방은 몇년 전부터 말 장수가 됐다.

노름판으로 색줏집을 돌아다니며 가산을 탕진하고

나자 배운 도둑질이라 말 장삿길로 들어선 것이다.

천석꾼 부자 유 진사가 말을 사게 된 연유는 마름 때문이다.

마름은 지주를 대신하여 소작권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마름은 평안감사하고도 바꾸지 않을 정도다.

나락이 익어 황금 들판에 금빛 파도 일렁일 때쯤 마름이 갓을 삐딱하게 쓰고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들판에 나타난다.

그러면 소작인들은 씨암탉에다 감로주 술상을 차려놓고 서로 제 집으로 모시려고

마름 팔이 찢어질 판이다.
유 진사는 처남에게 마름을 맡겼다가, 조카에게도 맡겨봤지만 이놈들이

하나같이 지주 등을 쳐 제 주머니만 채웠다.

유 진사는 두 놈 다 쫓아내고 본인이 손수 마름을 하겠다며

마 서방한테서 말을 산 것이다.

마 서방은 마부가 되고 옥실댁은 바느질 솜씨가 좋아 유 진사댁 침모가 됐다.

유 진사는 점잖은 선비다.

옥실댁이 마고자를 만들어주자 입어보더니 아이들 설빔을 입은 것처럼

좋아하며 옥실댁 손에 10냥을 쥐여줬다.
어느 날 밤, 마 서방이 동네 주막에서 술 한잔 걸치고 와서 곰방대만 계속 빨더니
“나는 마부를 하고 마누라는 침모를 하고….

이렇게는 못 살겠어.”

이튿날, 유 진사가 말을 타고 마 서방은 말고삐를 잡고 들판으로 나섰다.

몇걸음 떼지 않아 ‘히힝’ 말이 두발을 치켜들자 유 진사가 혼비백산 말에서

내려 사색이 돼 “나는 말을 못 타겠네” 했다.

말 콧잔등에서 피가 흘렀다.

마 서방이 작은 송곳으로 찔렀던 것이다.
마 서방이 말을 타고 마름이 됐다.

소작농들이 찔러주는 돈을 아낌없이 모두 챙겼다.

어느 날, 마 서방이 옥실댁을 앉혀놓고 “내 말 잘 들어.

우리 팔자 고칠 절호의 기회야”라고 말했다.

마 서방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

“내일 나는 박차와 안장을 사러 대처로 나갔다가

내일은 못 돌아오고 모레에 온다고 할 거야.

내일 밤 홑저고리 홑치마만 걸치고 사랑방으로 가서

유 진사 이불 속으로 들어가.

상처하고 홀아비가 된 지 네해가 지났으니 너를 안을 거야.

그때 내가 낫을 들고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이거야.

알았어?”

옥실댁은 말없이 눈만 껌벅거렸다.

이튿날 마 서방이 사랑방 앞에서

“나으리, 박차와 안장을 구하러 대처에 다녀오겠습니다.

오늘 밤엔 못 들어올 겁니다”

라고 인사했다.

마 서방은 주막에서 술 한 호리병을 챙겨 산속 솔밭에 숨었다가 집으로 내려왔다.

바람처럼 담을 넘어 제 방문을 열었더니 마누라 옥실댁이 없었다.

처마 밑에서 낫을 빼들자 사랑방의 불이 꺼졌다.

고양이 걸음으로 안마당을 건너 사랑방 문을 걷어찼다.

그때 불이 켜지고 사랑방에 숨어 있던 하인 넷이서 번개처럼

마 서방을 잡아 팔을 꺾어 포박했다.

 

마 서방이 살인미수로 3년 옥살이를 하고 나왔더니

옥실댁이 유 진사의 재취부인이 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