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섣달 짧은 해가 오늘따라 왜 이리 긴가.
어둠살이 사방 천지를 시커멓게 내리덮자
마침내 신 서방이 열네 살 맏딸을 데리고
맹 참봉 사랑방을 찾았다.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신 서방은 말없이 한숨만 쉬고, 맹 참봉은 뻐끔뻐끔
연초만 태우고, 신 서방 딸 분이는
방구석에 돌아앉아 눈물만 쏟는다.
“참봉 어른, 잘 부탁드립니다.
어린 것이 아직 철이 없어서….”
맹 참봉 사랑방을 나온 신 서방은
주막집에 가서 정신을 잃도록 술을 퍼마셨다.
이튿날,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 신 서방은
술이 덜 깬 걸음으로 맹 참봉을 찾아갔다.
“참봉 어른, 약조하신 땅문서를 받으러 왔습니다.
” 맹 참봉이 다락에서 땅문서를 꺼내
신 서방에게 건넸다.
노끈을 풀어 땅문서를 보던 신 서방이
“다섯 마지기밖에 안 되네요.
나머지 다섯 마지기는?” 하자 맹 참봉 입에서
오장육부를 뒤집는 말이 흘러나왔다.
“자네 딸은 숫처녀가 아니여.
다섯 마지기도 과한 거여.”성질 같아서는
목침을 들어 맹가 놈 대갈통을 박살내고 싶었지만
신 서방은 꾹 참고 말했다.
“아직 열네 살밖에 안된 어린앱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러자 맹 참봉이 화를 내며
“증거가 있어, 증거가! 요 위에 피 한 방울
찍히지 않았어!” 한다. 쫓겨나다시피 맹 참봉 집을
나온 신 서방은 또 주막으로 가 통곡했다.
며칠 후 다시 맹 참봉을 찾아간 신 서방은 하인들에게
주먹찜질까지 당했다. 맏딸을 팔아먹고 제값도 못 받아
술독에 빠져 사는 신 서방은 그날도 곯아떨어져
날이 밝아도 일어날 줄 모르는데,
포졸들이 들이닥쳐 온 집을 뒤지더니
오랏줄로 신 서방을 묶어 동헌으로
끌고 가 사또 앞에 세웠다. “네 이놈,
도망친 네 딸년의 행방을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사또의 찌렁찌렁한 불호령에 놀란 신 서방이
이리저리 둘러보니 맹 참봉이 보였다.
“맹 참봉은 저놈 앞에서 다시 한번 경위를
설명하라!” 사또의 호통에 맹 참봉이 답했다.
“소인이 산 너머 상가에 문상을 하고 삼경이 되어서야
집에 왔더니 제 방의 다락 자물통이 뽑혀져 나가고
다락 속 금붙이가 몽땅 없어지고 저 놈의 딸년도
사라졌습니다. 제 아비와 내통을 한 게 틀림없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신 서방은 곤장 스무 대를 맞고
엉덩이가 피투성이가 되어 옥에 갇혔다.
사또는 포졸들을 풀어 나루터 길목을 지키고
고갯마루 외통길을 막아 온 고을을
뒤져도 도망간 분이를 찾지 못했다.
봄이 왔을 때 신 서방은
면회 온 마누라로부터 기막힌 소식을 들었다.
맹 참봉이 분이 몸값으로 줬던 논다섯 마지기를
도로 빼앗았다는 것이다.
혀를 깨물고 죽고 싶어도 어린 자식들이 눈에
아른거려 죽을 수도 없었다.
찌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고을 사람들이 맹 참봉네
담 밖으로 모여들었다. ?“세상 살다가
빨간 모과는 처음 보네.” “길조여, 흉조여?”
소문은 사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빨간 모과? 모과가 빨갛다?”
사또가 갑자기 고함쳤다.
“여봐라!” 사또는 육방관속을 대동하고
맹 참봉네 사랑방 앞의 아름드리 모과나무 앞에가
모과나무 밑을 파렷다!”하고 불호령을 내렸다.
치마끈으로 목을 맨 분이의 시체는 원한에 사무쳐
눈을 뜬 채 썩지도 않았다.
목에 감긴 치마끈 끝엔 뽑힌 자물통이 달려 있었다.
맹 참봉은 곤장 서른 대를 맞고 피와 똥이 범벅이
되어 옥에 들어가 신 서방이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
사또는 맹 참봉의 논밭 백 마지기를 신 서방에게 주고,
양지바른 곳에 분이를 묻어주었다.
그리고 혼을 달래는 굿판을 벌이고 위령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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