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화장(火葬)

써~니 2023. 1. 28. 17:23

부모없이 외가에서 자란 유일문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외할머니 유언에
봉화 춘양 땅 만석봉 바위굴로 갔는데…



 젊은 나이에 예문관에 들어가 왕의 총애를 받던 유일문이 어느 날 슬픈 전갈을 받았다.

한평생 자신을 키우는 데 갖은 정성을 바친 외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것.

왕의 윤허를 받아 곧장 말을 타고 강원도 영월로 향했다.

자꾸 눈물이 흘러 산천이 물속에 잠긴 듯 어른거렸다.

 어려서부터 외가에서 자란 유일문은 부모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하다.

서당에 들어가 <사자소학>을 배울 무렵, 부모님이 사무치게 그리워

외할머니에게 진실을 알려 달라고 울면서 매달렸다.

얼굴을 치마폭에 묻고 한참을 우신 외할머니는 “네가 세살 때 엄마는 열병에 걸려 죽고,

아버지는 집을 나가 이때껏 소식조차 없다”고 대답했다.

섧게섧게 우는 외할머니를 본 유일문은 이후 두번 다시 부모님 얘기를 입밖에 내지 않았다.

 상념에 젖어 엿새 만에 영월에 당도해 외할머니를 보니

 

몸만 쓰러진 게 아니라 말문도 거의 막혀 있었다.

피골이 상접해 눈앞에 저승사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외할머니는 유일문의 손을 잡더니 가냘프게 입을 떼었고, 손자는 귀를 바짝 갖다 댔다.

 “네 아부지가 학학, 경상도 봉화 춘양 땅 학학, 만만 서석 보봉 중턱 바바바위굴에 사살고 있으니….”

 외할머니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유일문은 5일장을 치르고 백두대간을 따라 경북 봉화로 내려갔다.

마침내 열이틀 만에 춘양 땅에 발을 디뎠다. 지나가는 노인 한 사람을 붙잡고

“이곳에 만석봉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을 주막집으로 데려가 막걸릿잔을 올리며 “그곳에 바위굴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그 바위굴에는 귀신이 살아 아무도 범접하지 못한다”면서

“자세한 얘기를 들으려면 닭실마을 사는 심마니 강노인을 만나 보라”고 알려줬다.

 그러나 춘양에서 닭실마을을 가려면 만석봉 반대 방향으로 꼬박 하룻길이었다.

유일문은 조정으로 돌아가는 날이 지체될 것 같아 말잡이 하인을 데리고 똑바로 만석봉으로 향했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바위굴을 찾았다. 통나무로 짠 육중한 입구 문을 열고 횃불을 밝혀 안으로 들어가자

조촐한 세간 옆에 누군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홱- 이불을 젖히자 이럴 수가! 앙상한 백골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목탁을 안고 목엔 백팔염주가 걸려 있었다.

유일문은 동굴 밖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쌓고서 백골을 얹어 불을 붙였고,

한줌으로 변한 재를 가지고 내려오다 내성천에 뿌려 버렸다.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 유일문은 날이 저물어 닭실마을에서 머물기로 했다.

주막에서 술을 기울이다가 불현듯 심마니 강노인이 떠올랐다.

하인이 찾아와 주막집에서 마주한 강노인은 그간 외할머니가 감췄던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걷지도 못하고 폴폴 기어다니던 유일문이 어느 날 등잔불을 건드려 집안이 화마에 휩싸였다.

사랑방에 있던 유진사가 급하게 아들 일문을 구한 뒤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가

고뿔로 누워 있던 부인을 안고 나왔다.

하지만 부인은 심한 화상으로 죽고 말았다.

유진사도 벌겋게 단 인두로 얼굴을 지진 듯 한쪽 눈은 실명되고 나머지 눈도 단춧구멍처럼 녹아버렸다.

콧잔등은 없어지고 구멍만 두개 남았으며, 입은 턱밑으로 내려앉아 귀신처럼 변했다.

 유진사는 그 길로 세상을 등지고 바위동굴 속에서 혼자 살았다.

그때 유일하게 만난 사람이 심마니 강노인이었다.

 “아드님이 자라는데 그런 모습의 아버지는 방해된다고 판단하신 것이죠.”

강노인이 길게 한숨을 토하며 말을 이었다.

 “불을 무서워해 겨울에도 불을 지피지 않았고

아궁이도 만들지 않은 채 생식으로 한평생을 살았지요.

작년 가을 죽기 전에 제게 유언을 남겼어요. 아들이 찾아올 때까지 장사를 치르지 말라고.

바위굴 뒤 양지바른 곳에 묏자리를 봐뒀으니 내일 장사 치르러 가십시다.”

 벌써 화장한 것도 모른 채 말을 전하는 강노인 앞에서 유일문은 짐승처럼 울부짖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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