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계모의 코를 꿰다

써~니 2023. 4. 4. 16:33

계모로 들어온 기생, 본처의 딸을 하녀 부리듯
어느날 밤 아버지없는 안방에서…



 천석꾼 부잣집 외아들, 강 초시는 제 아버지 강 진사 빈소 앞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통곡을 했다.

아버지 강 진사가 외아들에게 평생을 두고 걸었던 급제의 기대를 끝내 보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한 것이 강 초시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것이다.

 구일장을 치르고 강 초시는 이 방 저 방 쌓여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마당에 꺼내놓고

불태워버린 후 주막으로 가 술만 퍼마셨다. 사람이 변해버렸다.

 며칠 만에 집에 들어오면 조신한 부인을 두들겨 패기 일쑤고

그토록 귀여워하던 일곱살 딸도 곁에 오지 못하게 했다.

노름판에서 문전옥답 대여섯 마지기 논문서가 하룻밤에 날아갔다.

기생집 대문을 걸어잠그고 기생 일곱을 끼고 술을 마시고, 기생 설중매와 첩살림도 차렸다.

 어느 날 또 논문서를 가지러 집에 왔을 때 부인 민씨가 울면서 막자,

죽일 듯이 때리고 밟아 딸이 울면서 제 아비 다리를 부둥켜안자 어린 딸도 차서 처마 밑으로 떨궜다.

그 와중에 부인 민씨는 도망쳤다.

 그 길로 부인 민씨는 집에 돌아오지 않고 소식도 끊겼다.

강 초시는 첩, 설중매를 집으로 데려와 안방에 앉혔다. 일곱살 딸 명진이는 앞이 캄캄했다.

엄마 옆에 자던 명진이는 골방으로 쫓겨났다.

엄마가 보고 싶어 밤새 울고 나면 눈이 퉁퉁 부어 아침을 맞았다. 계모의 구박이 시작되었다.

 “안방 이불 정돈해라” “마루 닦아라” “신발 씻어라”….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명진이는 하녀가 되었다.

 언제나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버지 강 초시는 명진이가 “우리 엄마는요?” 물어보면

“네 엄마 여기 있잖아” 하며 계모를 가리켰다.

 공주처럼 예쁘던 명진이는 몇달 사이에 거지처럼 얼굴이 더러워지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손은 거칠어지고 옷은 땟국물이 흘렀다.

하녀까지 명진이 알기를 발가락의 때처럼 여겨 “물 길어 오너라”

“아궁이에 불 지펴라” 부려먹기 시작해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강 초시는 첩을 집에 들여놓은 지 반년도 안돼 또 다른 기생에게 반해 딴살림을 차렸다.

계모가 그 집에 가서 살림살이를 부수며 난리를 치고 오자

그날 밤에 집으로 들어온 강 초시가 계모를 작살내더니

이튿날부터 발길을 끊고 조상 제삿날에만 집으로 왔다.

 강 초시한테 당한 계모는 화풀이로 명진이를 더더욱 괴롭혔다.

어느 날 저녁 일곱살 명진이가 하루 종일 일을 한 터라 부뚜막에 서서 저녁수저를 놓자마자

골방에 들어가 쓰러져 잠이 들었다.

 초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가 삼경이 기울었을 때 깨어나 쉰밥을 먹어 배탈이 났는지

통시에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그때 뒷담 쪽문이 열리는 소리가 살짝이 나서 일어나 문틈으로 봤더니

시커먼 사람 형체가 두리번거리다가 고양이 걸음으로 사뿐히 마루에 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명진이는 다리가 후들거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쾅쾅거리던 가슴을 가라앉히고 통시에서 나와

골방으로 가는데 안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헉헉, 학학, 나 죽어, 나 죽어, 학학!”

 바로 그때다. 문을 활짝 열며 “우리 어머니 죽이는 놈이 누구야!

” 다듬잇방망이를 든 명진이 뛰어들어가 벌거벗은 채 계모를 죽이려고(?)

그녀를 올라탄 번들거리는 중놈의 머리를 때렸다.

옷을 옆구리에 끼고 불알을 덜렁거리며 걸음아 나 살려라 중놈이 도망쳤다.

 안방 문을 꼭 잠그고 코빼기도 안 보이던 계모가 삼일 만에 나와

생글생글 웃으며 명진이에게 “이거 짓는 데 삼일 걸렸다”면서 비단 치마저고리를 입혀주며

“아버지한테 도둑이 들어왔다는 얘기는 하지 말아라” 귓속말을 덧붙였다.

 명진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명진이는 다시 공주님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아버지가 왔을 때 명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진이는 손끝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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