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춘양 주모

써~니 2023. 5. 25. 22:37

나루터 주막집을 운영하는 주모

동네를 돌며 외상값을 받는데…

류 진사네 사주단자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방 첨지에게 나루터 주막집 주모가 찾아왔다.

혹시 무슨 소식이라도 들고 왔나 싶어 사랑방으로 들라 했더니 한다는 말씀 좀 보소.

“첨지 어른, 혼사 준비에 바쁘시죠?”

분을 덕지덕지 발랐지만 징그럽게 웃는 얼굴이 주름투성이다.

“어흠, 어흠. 무슨 소식이라도 있는가? 얼른 말하고 가보게!” 주모가 눈을 아래로 깔면서

“쇤네, 한 많은 이 고을, 춘양을 떠나려고 합니다요.” “알았네, 잘 가게.”

별것이 와서 별소리를 한다는 듯 방 첨지는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눈알을 굴렸다.

“첨지 어른께서 외상값을 정리해주셔야겠습니다.”

“내가 자네한테 무슨 외상을 달아놨나?”

주모가 치마 속에서 치부책을 꺼내 펼쳐보더니

“을사년 시월 열이렛날 밤에 쇤네와 만리장성을 쌓고 해웃값도 안 내고….”

주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년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게야!”

방 첨지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재떨이를 냅다 던졌다.

재떨이에 맞은 허리를 움켜쥐고 주모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이튿날, 미치고 환장할 일이 벌어졌다.

관아의 사령이 소환장을 방 첨지에게 전해주고 돌아가자

방 첨지는 팔을 걷어붙이고 동헌으로 달려갔다. 사또가 방 첨지를 불러올렸다.

방 첨지가 버럭버럭했다.

“나으리, 소인은 그런 적이 없었고 저년이 내미는 치부책의 을사년이라면 18년 전입니다.”

사또가 뜸을 들이다가 “생떼를 쓰는 저년과 송사를 벌이다가 소문이 돌면….

” 방 첨지가 새파랗게 질렸다. 논 다섯마지기 땅문서를 혼수로 류 진사에게 건넸지만,

류씨네 문중에서 쌍놈 집안과 혼사를 치른다고 반대하는 어른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은 차에

이런 점잖지 못한 소문이 날세라 방 첨지는 꼼짝없이

사또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거금 1200냥을 주모에게 건넸다.

두번째 걸려든 사람은 서당 훈장님이다.

훈장을 하기 전, 젊었을 때 나루터 주막 주모가 기생집에서 이패기생을 할 시절에

두어번 잠자리를 한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와서 해웃값을 내놓으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러나 서당 학동들이 소문을 들을세라 사또의 중재안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여

빚을 내어 500냥으로 입막음했다.

 

세번째는 황 의원, 네번째는 강 대인이다.

강 대인도 그런 송사가 소문나면 체면이 구겨져 얼굴 들고 식솔들 볼 낯이 없을 것 같아

사또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600냥을 내놓았지만 하도 어이가 없어 주모에게 물어봤다.

“주모, 소문이 겁나 돈은 준다만 자네 해웃값이 그렇게 비쌌나!”

주모가 고개를 곧추세웠다.

“대인 어르신, 그때 제 나이 열아홉, 하룻밤을 잤지만 대인께서는 세번이나 올라오셨고,

그때 제 해웃값을 제대로 받아 복리로 늘렸으면 600냥도 넘어요!

사또 나으리가 그것만 받으라 해서 봐주는 거예요!

” 허파가 뒤집힌 강 대인은 “그래, 미친개에게 물린 셈 치자”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강 대인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유기점 송 부자, 오 진사, 조 초시….

사또가 육방관속을 모아놓고 이튿날 대구도호부에서 감사 나오는 관찰사에게

티끌만큼도 책잡히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하라 독려하고 동헌 대청으로 돌아와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주모가 찾아왔다. 사방을 두리번거린 사또가 “송사를 벌일 거리가 또 있는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지막 한사람 남았습니다, 나으리.” “누군가?”

주모가 사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바로 사또 나으리입니다요.”

사또가 화들짝 놀라 황소 눈알이 튀어나오려할 때 주모가 손가락을 까닥까닥하자

기둥 뒤에 숨었던 열댓살 처녀가 나왔다.

“눈하고 입 모양이 사또 나으리를 빼 꽂았지요?”

사또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접힌 부채로 주모의 머리를 쳤다.

주모는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고 치부책을 꺼내 펼쳤다.

“병인년 삼월초 엿샛날 밤, 나으리가 건달이던 시절에 저를 안았습니다.

나으리의 딸이 시집갈 나이가 됐는데 호적이 없습니다요.

” 사또가 펄펄 뛰자 주모는 조용히 말했다. “할 수 없군요. 내일 관찰사님에게….”

 

사또가 “알았네, 알았어” 하며 일어나 서헌에 다녀왔다. “여기 있네” 하며 전대를 내밀었다.

여러 춘양 유지들한테 우려낸 해웃값의 반은 사또의 주머니로 들어갔는데 그걸 몽땅 토해낸 것이다.

매관매직 거간꾼에게 춘양 사또 자리를 산 이 탐관오리는 물불 가리지 않고 돈을 먹었다.

주모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로는 부족합니다요.”

1000냥을 더 받아 주모는 흔적 없이 춘양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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