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그 여인

써~니 2023. 6. 1. 18:50

상주 관아에 불쑥 나타난 한 여인,

딸아이의 아비를 찾아달라 하는데…

상주 관아에 한 여인이 예닐곱살 난 여자애 손을 잡고 나타나

 

동헌 마당에서 사또를 쳐다보며 하소연을 했다.

“쇤네는 7년 전 이곳 상주에서 두어해 살았습니다.”

말을 잇지 못하고 땅만 내려다보고 있어 사또가 “그래서?”라며 용건을 재촉하자

여인이 말했다. “쇤네 딸년 아비를 찾아주십시오.”

“딸애 아비라? 아비가 도망을 쳤느냐?”

“아닙니다. 쇤네는 그때 만상 객주에서 찬모를 도와 부엌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요.”

사또가 의아한 눈초리로 “그때 잉태를 했다면 출산날에서 역산, 아비를 집어낼 수 있잖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여인이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요” 했다.

옆에 있던 이방이 손으로 입을 막고 키득키득 웃자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한 사또가 이방을 쳐다봤다.

이방은 “하룻밤에도 두세차례 다른 씨를 받는데 어떻게 콕 집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제야 사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객주는 팔도강산 물산을 가지고 온 상인들을 위해 숙박·창고·거간을 하는,

항상 시끌벅적거리는 큰 집이다.

그녀가 제 말로는 찬모를 도와주는 부엌데기라지만 저녁상을 치우고 나면

객방으로 불려가 치마를 벗는 들병이와 다름없었다.

사또가 측은한 생각도 들어 “집히는 데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모기소리만 하게 대답했다.

“네댓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고?” 그 여인이 입을 떼지 못하자

이방이 동헌 뜰로 내려가 그 여인 입 앞에 귀를 댔다. 이방이 동헌으로 올라와 사또에게 고했다.

안동포 도매상 권 생원, 명주 대상 김 대인, 건어물상 박 대포, 곶감 거상 황 참봉, 새우젓 도매상 하 영감,

이렇게 다섯이 꼽혔다.

사또가 물었다. “이 다섯사람을 불러오면 딸아이 아비를 찾아낼 수 있겠느냐?”

그 여인이 서슴없이 “쇤네에게 방법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또가 “어떻게?”라고 묻자 그 여인이 대답했다.

“혈육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다섯사람을 빙 둘러 앉혀놓고 딸아이를 가운데 세워두면

지남철처럼 자기 아비에게 붙을 겁니다.” 사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주 고을에 소문이 쫙 깔렸다. 이번 장날에 동헌 마당에서 아비 찾기 구경거리가 있다고.

이방이 다섯사람 아비 후보자를 찾아가 동헌 출두 통보를 하자 다섯 모두 펄쩍 뛰었다.

다섯사람과 이방이 김 대인 사랑방에 모여 술잔을 돌리는데 한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장날, 동헌 마당에 호사가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데 가운데

그 여인이 서 있고 딸아이는 제 어미 치맛자락을 잡고 고목의 매미처럼 딱 붙어 있었다.

“황 참봉을 닮았네.” “아니야, 하 영감을 빼다 꽂았어.” “김 생원 판박이야.”

입 달린 사람은 모두 한마디씩 하는데 사또와 귓속말을 나눈 이방이 마당으로 내려와

그 여인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그 여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걸로는 나중에 내 딸 혼수값도 안됩니다요.”

이방이 부리나케 관아를 빠져나갔다가 한참 후에 다시 나타났다.

각자 300냥씩 거뒀다가 다시 200냥씩 추가로 거둬 2500냥을 주자

그 여인은 500냥을 떼어 다리 놓는 데 보태 쓰라고 사또에게 건네주고

딸아이를 데리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석달 후, 안동 관아에 그 여인이 나타났다.

이번에 그녀가 데리고 온 딸은 열대여섯살 남짓했다.

사또 앞에서 “쇤네는 15년 전에 이곳에서 한해 동안 살았습니다.”

사또가 뭘 했는지 물어보자 오동관에서 기생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딸아이 시집갈 나이가 돼서 아비를 찾으러 왔다며 짐작 가는 사람 일곱을 꼽았다.

그중 한사람, 유 참사가 이방과 함께 그 여인을 은밀히 만났다.

유 참사가 15년 전 오동관 기생 얼굴을 기억했다.

그 여인은 일곱사람으로부터 600냥씩 4200냥을 거둬서 사라졌다. 억새가 흔들리는 고개를 넘었다.

“어머니,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요?”

“이제부터 너는 내 딸이 아니다. 네 갈 데로 가거라.”

어머니(?)는 딸(?)에게 약속한 200냥에 100냥을 더 보태 300냥을 쥐여줬다.

어느 날 김천의 국밥집에서 열한두살 돼 보이는 계집애가 국밥을 나르는 걸 보고 그 여인이 말을 붙였다.

“너 몇살이냐?” “열한살이에요.” 딱 맞아떨어지는 나이다.

10년 전 그 여인은 성주에서 2년 동안 기생 노릇을 했었다.

“네가 나를 따라 이레 동안 성주에 가면 200냥을 주마.”

국밥집 심부름 계집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레 동안 넌 내 딸이야. 지금부터 어머니라 불러라.”

구절초가 하얗게 핀 산허리를 돌아 모녀(?)는 부지런히 성주를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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