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형제

써~니 2023. 5. 25. 23:11

형   제




새벽녘에 노름판이 파하자 모두가 우르르 노름방을 나와 장터거리 국밥집으로 향했다.

그날이 제천 장날이라 동이 트기 전부터 국 솥이 설설 끓는데 장꾼들보다 먼저 노름꾼들이 국밥집을 채웠다.

한쪽 구석에는 한발 먼저 온 오 처사와 꼽추, 털보 일행이 벌써 국밥을 뜨기 시작했다.

젊은 노름꾼 변 초시가 등을 돌렸지만 오 처사 일행 가까이 바짝 다가앉아,

귀를 세워 오 처사 일행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어찌 그렇게도 끗발이 오르지 않습니까, 어르신?”

호위무사 털보가 목메어 꼽추를 보고 짜증을 부리자 꼽추는 탁배기 잔만 연신 비우며 입을 닫고 있는데,

“여보게 끗발은 탓하는 게 아니야” 하면서 젊은 오 처사가 점잖게 털보를 꾸짖었다.

꼽추의 판돈을 쓸어간 변 초시가 속으로 웃었다.

이튿날 밤 황 생원 집 노름방은 또다시 꽉 들어찼다.

천석꾼 변 진사 아들 변 초시, 약재상 박씨, 금은방 황 노인,

그리고 꼽추. 이렇게 넷이 마작판을 가운데 놓고 바짝 다가앉았다.

열기가 오르자 꾼들은 예민해졌다. 끗발이 고개 숙인 약재상 박씨가 “패를 그렇게 쌓지 마시오” 하고

꼽추에게 시비를 걸자 꼽추도 지지 않고 “노름판이 지저분하네. 억지 부리지 마시오”

하고 되받았다. “뭐라고?” 언성이 높아지자 꼽추 뒤에 산처럼 앉아 있던 털보가 눈을 부라리며

“어험 어험” 헛기침을 하니 박씨가 쑥 들어갔다.

삼경이 지나기 전에 박씨가 나가떨어지고 포목점 우 서방이 들어왔다.

그날도 끗발은 변 초시에게 쏠렸다. 개평꾼과 구경꾼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변 초시 끗발은 화수분이여.” 그날도 변 초시가 싹쓸이를 했다.

열아홉살 변 초시는 열다섯에 초시에 합격해 천재 났다 소리를 들었지만

그 후 대과에 거듭 낙방하더니 이날 이때껏 공부에 매달리느라 꾹 눌러 참았던 쾌락의 늪에 발을 담갔다.

사람들은 부전자전이라 했지만 천석꾼 아버지 변 진사는 주색에는 빠졌어도

노름은 하지 않아 재산을 지켰다.

아버지 변 진사가 마흔에 갓 들어서며 골골하다 병석에 드러눕자

외동아들 변 초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책을 접고 저잣거리 친구들과 어울렸다.

기생집을 들락거리더니 급기야 도박에 매몰되고 말았다.

지난 한해 변 초시가 마작판에 처박은 전답이 백마지기가 넘었다.

올들어 정초부터 끗발이 오르는 데다 어디서 굴러들었는지 어리숙한 봉, 꼽추 일행이

돈을 풀어 일거에 전답 삼십여마지기를 찾았다.

변 초시가 이제 마작에 눈을 떴다고 큰소리치며 판을 키웠다. 오십여마지기를 찾았다

. 계속 갖다 바친 꼽추 일행이 기가 죽었다.

변 초시는 꼽추가 손을 털고 제천을 떠날까봐 가끔씩 잃어주는 여유를 부렸다.

꼽추의 뒷돈을 대는 스물 남짓한 오 처사는 그렇게 거금을 날리고도 태연했다.

변 초시가 또다시 판돈을 키우자 다른 꾼들은 가슴 떨려 못하겠다며 물러앉고

풍기 인삼장수와 원주 최 부자 아들이 들어왔지만 실상은 변 초시와 꼽추 단둘의 진검승부가 됐다.

꼽추가 마침내 장풍을 일으켰다. 삼경이 오기 전에 변 초시 판돈이 바닥났다.

이튿날부터는 아예 땅문서가 오갔다.

변 초시는 눈알이 뒤집어져 잃은 재산을 한방에 다 찾을 듯이 판돈을 자꾸 올렸다.

보름이 지나자 천석꾼 부자 변 진사네 재산이 몽땅 꼽추 손을 거쳐 오 처사 품에 안겼다.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밤 개평꾼과 구경꾼에 둘러싸여 마작 열기가 불을 뿜고 있을 때

‘꽈당’ 문이 부서지며 변 초시 아버지 반신불수 변 진사가 행랑아범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와

지팡이를 휘둘러 노름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모두가 도망가고 방에 남아 있는 꼽추 일행 중 오 처사를 변 진사가 뚫어지게 내려다보다가

“어어어∼” 하며 쓰러졌다. 행랑아범이 달려 나가 의원을 데리고 왔을 때

오 처사가 변 진사를 부둥켜안고 오열하고 있었다.

의원이 침 놓을 틈도 없이 진맥을 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주막에서 탁배기를 마시던 변 초시가 달려와 털썩 주저앉았다.

객사한 변 진사를 둘러업은 사람은 호위무사 털보였다

. 밤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빈 장터를 빠져나가 동네 골목을 돌아 변 진사네 집에 다다랐다.

대청에 돗자리를 깔고 변 진사를 눕혀 광목천을 덮었다.

모든 전답 땅문서도, 고래대궐 같은 기와집 집문서도 마작판에 휩쓸려 남의 품속으로 들어갔다는 걸

알아차린 하인·하녀들이 닥치는 대로 살림을 챙겨 도망가고 없어

을씨년스러운 집에는 변 진사의 부인, 안방마님만이 기둥을 잡은 채 몸을 가누고 있었다.

뒤따라온 오 처사와 안방마님의 눈이 마주쳤다. 생면부지의 첫 만남인데 서로 살기가 튀었다.

안채 대청에 빈소가 차려져 오일장을 치르는데 오 처사가 사랑방을 차지했다.

꼽추의 돈줄인 오 처사가
변 초시로부터 전 재산을 낚아챘으니 이 집의 새 주인으로 사랑방을 차지하는 건 그렇다 치고

상복까지 차려입었다. 물론 빈소에서 문상을 받는 상주는 변 초시였다.

변 진사가 노름판에서 객사를 했고 상주 변 초시는 알거지가 됐다는 소문이

제천 고을 바닥에 쫙 퍼져 문상객도 가뭄에 콩 나듯이 띄엄띄엄 왔다.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오일장 발인 날이 밝았다. 망한 집안의 장례는 초라했다.

만장기도 없이 상여가 앞서고 상주 변 초시가 굴건제복 차림으로 뒤따랐다.

몇 안되는 일가친척이 그 뒤를 잇는데

오 처사가 상복을 입은 채 죽장을 짚고 맨 뒤에 따라갔다.

하관을 할 때 상주 변 초시가 만감이 뒤엉켜 통곡을 하는데 먼발치 솔숲에서 오 처사도 어깨를 들썩였다.

변 진사가 노름방에서 객사하던 날 행랑아범이 의원을 데려왔을 때

오 처사가 변 진사를 품에 안고 오열하고 있었던 일이 이상해 행랑아범은 유심히 오 처사를 지켜봐왔다.

더더욱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장례를 마친 며칠 후 이 집 주인이 된 오 처사가 집 정리를 했다.

노름꾼 꼽추와 그의 호위무사 털보를 바깥채에 기거하도록 하고 행랑아범을 사랑방에 모시고

자신은 행랑채 뒷방으로 갔다.

행랑아범이 어리둥절 어쩔 줄 모르는데 오 처사가 큰절을 올리며

“어르신, 이제부터 아버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하고는 꿇어앉아 행랑아범의 두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 집 주인은 아버님이십니다”라며 품속에서 집문서를 꺼내 행랑아범의 손에 쥐여줬다.

“이 집의 전답도 모두 아버님 소유입니다. 현청의 등기부등본도 아버님 존함으로 이전해놨습니다.”

비단 보자기에 싼 땅문서 높이가 한자를 넘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어 입만 벌리고 있는 행랑아범에게 오 처사는 술 한잔을 올리고,

행랑아범이 따라주는 술 한잔을 받은 오 처사가 돌아앉아 술잔을 비웠다.

주거니 받거니 밤이 깊어가고 둘 다 술이 올랐다.

“소자는 어머니 성을 따라 오가가 됐습니다만 핏줄을 따르면 변가가 됩니다.”

행랑아범이 ‘땅’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이 “어머니가 오…오…오월이란 말인가?” 목소리가 떨렸다.

오 처사는 대답을 못하고 흐느끼고 있었다.

강산이 두번이나 변한다는 스무해 전. 매천댁이 천석꾼 부자 변 대인 댁에 시집왔더니

오월이란 예쁜 부엌데기 하녀가 입덧을 하고 있었다.

씨를 뿌린 작자는 신랑 변 진사였다. 새 신부 매천댁은 표독스러웠다.

쫓아내기 전에 태아를 유산시켜야 후환이 없다고 별의별 짓을 다 했다.

소복에 산발을 하고 입에서 피를 흘리며 칼을 물고 한밤중에 오월이 방에 들어가

그녀가 기절을 했지만 입덧을 멈추지는 않았다. 봉당에서 떠밀어 나동그라지게 해도 허사였다.

장날 오월이와 집사가 장터에 가서 매천댁이 사 오라고 한 걸 모두 사서 지게에 싣고 국밥집에 들어갔다.

보통은 집으로 돌아갈 때 고갯마루에서 주먹밥을 먹는데 그날은 달랐다.

오월이는 정신없이 국밥을 먹는데 집사는 탁배기를 자꾸 마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갯마루에서 쉬면서 집사가 한숨을 푹푹 쉬다가 입을 열었다.

“오월아, 아무것도 묻지 말아라. 주먹밥을 싸 들고 멀리멀리 도망을 가거라.

너는 저 솔숲 땅속에 파묻힌 몸이라 생각해라. 댕기를 잘라 내게 주고 이 보자기를 덮어써라.”

집사가 긴 한숨을 푸∼욱 토하더니 “손가락은 겁이 나서 못 잘랐다 할게”라고 말했다.

새파랗게 질린 오월이가 이빨을 깨물더니 지게에 걸린 낫을 빼 내리쳐 피가 솟구치는 손가락 하나를

떡갈잎에 싸서 집사의 조끼 주머니에 넣어줬다.

집사는 눈물을 떨구며 목이 메어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둘이서 가시버시가 돼 아들딸 낳는 꿈을 꾸며 살았는데” 하고 울먹였다.

오월이가 집사의 목을 껴안고 매달려 기나긴 입맞춤을 하고선 어둠살이 내리는 고갯길로 사라졌다.

이십년 세월이 흘렀다. 오월이는 제물포에서 제일 큰 요릿집을 하고 있었고,

그렇게도 낙태하려 했지만 끈질기게 세상 밖으로 나온

오 처사는 노름 바닥에서 알아주는 마작 대가가 됐다.

열다섯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더니 해가 갈수록 당할 자가 없었다.

자신이 마작의 지존이라 자만에 빠져 있다가 마포나루터에서 임자를 만났다.

꼽추였다. 꼽추의 패를 만드는 솜씨에 오 처사는 혀를 내둘렀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전략이 없고 배짱이 없어 판을 키울 줄 몰랐고 노름판의 우격다짐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렇게 꼽추, 털보, 오 처사가 삼인조 마작단을 만들어 오 처사의 한이 맺힌 제천에 내려왔던 것이다.

이십년 전 오월이를 살려줬던 유 집사는 마흔세살 행랑아범이 돼 있었다.

울다가 웃다가 살아온 얘기에 감정이 복받쳐 오 처사와 행랑아범은 계속 술을 부어 달래는데,

‘똑똑똑’ 문고리 두드리는 소리에 술도 얘기도 끊어졌다. 변 초시가 들어와 오 처사에게 큰절을 올리며

“형님, 용서해주십시오. 으흐흐흑” 하고 흐느꼈다.

변 초시와 오 처사는 두살 터울 이복형제다.

사십구재를 올리고 탈상을 했다.

오 처사는 재산을 적당히 떼어 내주고는 변 초시와 그의 어미 매천댁을 내보냈다.

제물포의 오월이는 요릿집을 처분하고 제천으로 내려와 행랑아범과 조촐하게 혼례식을 올리고 합방을 했다.

오 처사와 꼽추와 털보는 어디론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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