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의 노망 고치기(止父妄談)
한 시골에 아들을 아홉 둔 노인이 살았다.
이 노인은 옛날 서당에서 글공부를 할 때 사략(史略)을 읽어서 중국 역사에
대해 조금 알고 있었다.
즉 중국 고대에는 온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天子)에,
전국을 9주(九州)로 나누어 그 책임자인
장(長)을 임명해 다스렸던 역사를 배웠던 것이다.
그래서 노인은 이 아홉 명의 아들을 두고,
늘 머릿속에 이들이 장차 9주의 장이 될 것을 상상하며 길렀다.
세월이 흘러 아들들은 모두 성장해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노인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약해졌다.
곧 노인은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옛날에 골똘히 생각하던 그 상상만 머릿속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나아가서 아들들이 9주의 장이 되었을 때 자신은 천자,
곧 황제가 된다는 망상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노인이
아홉 아들을 모두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
"어느새 너희들 모두 장성했구나.
이제는 9주의 장이 되기에 충분하니,
속히 그 절차를 밟아 의식을 갖추도록 하라.
그리되면 나는 이제 황제가 되는 것이니라."
이 말을 들은 아들들은 몹시 난처했다.
그러나 노인은 날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 하니,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걱정하여 모여서는 이렇게 상의했다.
"아들 된 도리로 부친을 속이는 죄는 비록 크지만,
그 잘못을 고쳐 드리는 일 또한 자식 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부친께서 자꾸 분수에 어긋난 망언을 하고 계시니,
민신(民臣)의 도리에 매우 불안한 지경이다.
우리가 좋은 계책을 꾸며 다시는
그런 망언을 입 밖에 내시지 못하게 해야겠다."
그렇게 결정한 아홉 아들들은 그 날부터
후원 깊숙한 곳에 포장을 치고 의자와 탁자를 마련한 다음,
커다란 일산(日傘)을 덮어
으리으리하게 보이도록 꾸몄다.
그리고 부친을 모시고 가서 포장 안의 높은 의자에 앉히고,
그 앞에 모두 엎드려 마치 신하가 임금 앞에서 하듯 아뢰었다.
"소자들은 이미 9주의 장이 되었사옵니다.
그리하여 이제 부친께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셨으니, 마땅히 무거운 관을
쓰셔야 하옵니다.
소자들이 마련한 황제의 관을 바치오니
늘 쓰고 계시옵소서."
이렇게 말하면서 돌로 된 절구를 들어 바쳤다.
노인은 황제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그 돌절구를 머리에 쓰자,
어찌나 무거운지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허리마저
꾸부러져 똑바로 앉을 수도 없었다.
이 때 아홉 아들과 손자들까지 모두 와서 엎드려
'천자 만세'를 외치니,
노인은 돌절구가 무거워 견디지 못하고 벗어 버리면서
벌떡 일어나 소리쳐 말했다.
"천자의 관이
이렇게 무거운 줄은 내 미처 몰랐다.
이 정도라면 나 같은 늙은이의
기력으로는 한 시각도 견디기 어렵도다.
다시는
천자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도 말지어다."
이에 아들들이
노인을 다시 방안으로 편히 모시니,
그 뒤로 노인은 9주의 장이라든가
천자라는 말을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 않았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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