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를 올리고 춘하추동을 한바퀴 돌기도 전에 신랑이란 게 기생집을 들락거리더니
동기 머리를 올려주고 첩살림을 차렸다.
양반집으로 시집온 지 한해도 지나지 않아 함안댁은 속이 숯이 됐다.
허구한 날 신랑과 어울려다니는 친구들도 모두가 양반입네 넓은 갓을 쓰고 사랑방에 앉아
시조를 짓고 고담준론을 나누지만 밤만 되면 개차반이 된다.
유 초시는 조부가 당상관을 지낸 명문대갓집 대주로 어릴 적부터 신랑과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며 의형제를 맺은 사이다.
신랑과 친한 또 다른 친구는 서당훈장이다.
조선팔도를 유람하던 선비 하나가 이곳 진주에 발길이 닿았다가 하도 명필이라
유림들이 그를 잡아 주저앉혀 훈장이 됐다.
신랑과 유 초시, 훈장은 항상 어울려다니며 낮에는 양반 행세를 하고 밤이면
술독에 빠졌다가 기생 배 위에서 엎어져 잤다.
그러다가 신랑이 병이 났다.
석달이 지난 어느 날, 첩은 집문서를 팔아넘기고 야반도주를 했다.
이튿날 유 초시가 함안댁을 찾아와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머슴 덕보를 데리고 가더니
신랑을 업고 왔다.
함안댁은 기가 막혔다.
싱싱할 때는 첩년 치마폭에 싸여 살더니 병이 나서 반송장이 되자 함안댁이 떠맡게 됐다.
사랑방에 눕혀놓자 유 초시와 훈장이 뻔질나게 드나들어 아예 낮이나 밤이나 대문을 열어놨다.
어떤 날은 의원이 오고, 어떤 날은 유 초시가 심마니를 데려와 삼베 보자기를 풀어 이끼에 싸인
산삼 세뿌리를 꺼내 푹 달여서 축 늘어진 신랑 입에 넣어줬다.
유 초시와 훈장은 신랑을 지극정성으로 간병했다.
사랑방에서 함께 자는 게 예사였다.
‘남자들의 우정이란 저런 것이구나’ 하고 함안댁은 감복했다.
친구들이 신랑을 돌보는 덕택에 함안댁이 훨씬 편해졌다.
신랑이 기생집을 쏘다닐 적에 신랑보다 그 친구들을 더 미워했던 일을 후회했다.
친구들의 염원도 외면한 채 신랑의 병세는 깊어만 갔다.
피를 토하고 곡기를 끊더니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밤에 눈을 감았다.
함안댁은 이 집으로 시집와 신혼의 달콤함도 맛보지 못했고 항상 애만 태워 신랑이 죽어도
가슴에 북받치는 슬픔이 없었다.
남의 눈이 무서워 우는 척만 했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 초시와 훈장은 구곡간장이 끊어지듯 땅을 치며 울었다.
두사람은 상복을 입고 문상객을 맞이하고 모든 장례를 상주처럼 빈틈없이 치러냈다.
칠일장을 치르고 삼우제를 지내고 함안댁이 사랑방을 정리하다가 깜짝 놀랐다.
신랑이 누웠던 요 밑에서 유서가 나왔는데, 요지는 유 초시에게 8000냥을 빌렸으니
논밭을 팔아서라도 갚으라는 것이다.
필체는 틀림없는 신랑 글씨다.
함안댁은 앞이 캄캄해졌다.
논밭을 다 팔고 이 집을 팔아도 8000냥을 만들 수 없는 노릇이다.
함안댁은 유서를 들고 훈장을 찾아갔다.
훈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산삼과 우황을 사느라 유 초시가 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다.
낙담해 실신할 것 같은 함안댁에게 훈장이 묘한 말을 했다.
유 초시가 함안댁에게 땅문서·집문서를 받았다 해서 함안댁을 쫓아낼 일이야 없을 테고,
유 초시가 함안댁네에 출입만 하면 될 것이라 했다.
함안댁이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하니 재산 모두 유 초시에게 바치고 유 초시 첩이 되라는 소리다.
집에 와 부엌에서 냉수 한사발을 마시고 퍼질러앉아 울고 있는데, 나뭇짐을 지고
머슴 덕보가 들어왔다.
함안댁이 눈물을 닦고
“이 사람아, 자네 새경을 아직도 못 줘서….”
“마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년에 받아도 되고, 먼 훗날 받아도 됩니다.”
함안댁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여보게, 산삼 한뿌리에 얼마나 하는가?”
덕보가 깜짝 놀랄 말을 했다.
“제가 마님댁에 들어오기 전에 심마니를 따라다닌 적이 있습니다. 나으리가 병석에 있을 때
달여준 것은 산삼이 아니라 산양삼이었습니다. 한뿌리에 세냥도 하지 않습니다.”
함안댁이 튀어오르듯이 안방으로 들어가 장롱 속에서 유서를 꺼내 자세히 보니 신랑 필체와
흡사했지만 삼수변의 마지막 획이 급하게 치켜올라간 게 달랐다.
곧바로 사또에게 달려갔다.
예방이 죽은 신랑의 필체와 유서의 필체를 보더니 다르다고 판정했다.
곤장 열대에 유 초시가 털어놨다.
가짜 유서와 유 초시가 가진 차용증은 훈장이 썼다는 것. 훈장도 곤장 열대에
고향 무산에서 사문서 위조를 했다가 들통이나 도망쳐서 이곳저곳 흘러다녔다는 걸
제 입으로 불었다.
유 초시와 훈장은 옥에 갇히고, 함안댁은 “퉤퉤, 양반놈들!” 한마디 뱉고는 가산을 정리해
덕보와 함께 어디론가 멀리멀리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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