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고구려 미천왕

써~니 2022. 11. 24. 12:25

고구려미천왕설화(高句麗美川王說話)

고구려미천왕설화(高句麗美川王說話)는

고구려 미천왕에 관한 전설(傳說)로 (삼국사기

(三國史記)고구려 본기(本紀)〉미천왕조에 전한다.

봉상왕의 동생 돌고(?固)의 아들 을불(乙弗)이

 왕의 화를 피해 방랑의 길에 올라 온갖 고생을

하다가 후에 국상 창조리(創造利) 등의

영접을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는 설화이다.

 

  고구려의 미천왕은 15대 왕(재위 300~331년)으로

 호양왕(好讓王)이라고도 한다.

휘(諱)는 을불(乙弗) 또는 우불(憂弗)이다.

 13대 서천왕(西川王)의 둘째 아들이 고추가(古鄒加)

돌고(?固)인데 그의 아들이다.

14대 봉상왕(烽上王, 돌고의 형)이 돌고를 의심하여

 죽였는데 을불은 간신이 피신하여 어렵게 목숨을

 부지하다가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에 의해

 봉상왕을 폐하고 왕으로 즉위하였다.

 우불(優弗)이라고도 하는데 왕위에 오른 후,

 영토를 넓히는 일에 열심이었다.

 

 당시 고구려의 상대는 진나라였다.

 진나라는 사마염이 세운 나라로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280년 오나라마저 멸망시켜

중국의 삼국시대를 통일한 나라다.

하지만, 불과 20년이 지나지 않아 8왕자들의

 반란을 시작으로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미천왕을 이를 놓치지 않고 302년 직접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진나라의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인을 잡아서 평양으로 데려왔다.

또 313년과 314년에 각각 진나라의

낙랑군과 대방군을 쫓아버렸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차지했던 진나라와 동방의 여러

 국가와의 중계무역의 이익을 뺏을 수 있었다.

아울러 평양주변과 황해도 일대의

 넓은 평야 지대를 차지할 수 있었다.

 당시 고구려에는 철제 농기구와 소를 이용한

 농사방법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새로운 농경지에서 보다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고구려는 미천왕 시기에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미천왕은 더욱 영토를 넓히고자 했지만,

 이때 방해자가 등장했다.

그것은 요서 지역에서 성장한 모용선비였다.

이들은 봉상왕 시기에도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해 온 적이 있고, 심지어 몰래 병사를 보내

서천왕의 무덤 속에 있는 보물을 훔치려다가

 실패하고 도망간 적도 있었다.

 

미천왕은 모용선비를 미워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모용선비는 317년 진나라(서진)가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는(동진) 과정에서 혼란에 빠진

한족들을 끌어들여 세력을 크게 키우고 있었다.

 새로 진나라에서 임명된 평주자사 최비는

모용선비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불만을 갖고

319년 미천왕에게 사신을 보내왔다.

최비는 고구려가 우문선비, 단선비와 함께

 모용선비를 공격해줄 것을 요청했다.

모용선비를 멸망시킨 후 그 땅을

나누어 가지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미천왕은 최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미천왕은 이 기회에 요하를 건너 영토를

넓힐 수 있고, 서쪽 국경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곧 군대를 보냈다.

고구려군은 요하를 건너 대릉하 주변에 위치한

모용선비의 수도인 극성을 공격했다.

 

 단선비와 우문선비도 군대를 보내어 연합공격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연합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모용선비의 계략에 빠져 고구려와 단선비는

 우문선비가 모용선비와 비밀리에 협조하는 것이라고

의심하고 군대를 철수하고 말았던 것이다.

모용선비는 홀로 남은 우문선비를 공격해 물리치고,

이 작전을 계획한 당사자인 평주자사 최비를

 붙잡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서 공격했다.

 

 최비는 두려워서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로 도망쳐왔다. 그 결과 진나라의

평주지역은 모용선비가 차지하고 말았다.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연합작전이

실패하는 바람에 모용선비를 격파하지 못했고,

요하를 건너 서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고구려 역사에서 아쉬운 순간이었다.

당시 북중국 지역에는 5호 16국 시대가

 막 개막되고 있었다.

진나라는 강남으로 쫓겨난  상태라 어떤 세력이라도

 이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었다.

그러나 모용선비가 가로막아 서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미천왕은 이후 자주 모용선비를 공격했지만,

 이미 힘이 커진 이들을 압도할 수가 없었다.

 미천왕은 거지처럼 살 때에도 왕실의

자손이라는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고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숙우와 조불이 그가 남루한

 옷차림을 했어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미천왕의 이러한 당당함은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고구려를 더욱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한 왕이었기에

백성들에게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고구려는 농업과 상업이 앞선 시기보다

 발전하고 영토도 커져 장차 고구려가

 크게 성장할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비록 방해자를 만나 그의 원대한 계획은

 미완성에 그쳤지만, 그는 4세기 초 고구려를

크게 발전시킨 뛰어난 임금이었다.

 

  고구려 때의 설화로 《삼국사기》

(三國史記) 17권 〈고구려 본기〉에 전한다.

어려서 갖은 고생을 겪은 뒤 자라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는

백제 무왕(武王)의 어린시절 이야기인

 서동요(薯童謠)나 고구려의 장군 온달(溫達)

 이야기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제15대 왕인 미천왕이 즉위하기 전에

왕손(王孫)의 신분을 감추고 살았던 피신시절의

행적을 전하는 이야기로서, 3세기 후반의 고구려

사회상을 전하는 사실적인 자료로서 가치가

높게 평가되어 당시 시대상의 분석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