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새 구멍을 뚫으면 그 죄가 훨씬 더 무겁다

써~니 2022. 12. 1. 10:58

 

새 구멍을 뚫으면 그 죄가 훨씬 더 무겁다

 
궁중에 궁녀로 있다가 왕궁 밖으로 내보내어진
이른바 '방출궁녀(放出宮女)' 와는 누구도 함께
잠자리를 해서는 아니 되는 율법이 있었다.
이 율법을 '방출궁녀 간통금지율
(放出宮女奸通禁止律)' 이라고 했다.

선조때 도승지 자리에 있던 이항복의 집에 일을
 도와주는 겸인(비서) 한 사람이 있었는 데,
이 사람이 선조 임금의 궁녀로 있다가 방출된
한 여인을 사랑하여 간통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방출궁녀 간통금지율에 걸려서
구금되었고, 장차 사형에 처해질 처지에놓이게 되었다.
당시 이항복은 도승지라는 막강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중죄를 저지른 이 겸인을 방면시킬
도리가 없었다. 기회를 엿보던 중 때마침 퇴궐한
이항복을 급한 일로 다시 입궐하라는 연락이
오자 '옳지, 오늘 이 기회를 이용해야지.'

 이렇게 생각한 이항복은 급히 들어오라는 어명에
 일부러 시간을 지체시켜 늦게 입궐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도승지가 부름에 지체했다며
화를 내고는 그 까닭을 물었다.

이에 이항복이 늦게 된 이유에 대해 아뢰었다.
"전하, 황공하옵니다. 명을 받고 급히 대궐로
달려오고 있는데, 종루가(鐘樓街)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웃으면서 웅성거리고 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가서 물어보니

사람들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이 아직 화가 덜 풀려 이항복을 노려보자,
 이항복은 이야기를 지어내어 아뢰었다.
'모기 한 마리가 날아다니다가 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진드기'라는 벌레를 만났습니다.

이 진드기는 별종진드기로서 다 자라면
콩알만하게 되는 데 항문이 없어서 배설을 하지
못하는 곤충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의 피를 빨아먹으면 계속 몸의 가죽이
 늘어나 커지다가 마침내 더 커지지 못하고
 배가 터져 죽는 벌레입니다.

모기를 만난 진드기는 배설을 하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다가, 모기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봐 모기야, 나는 본래 항문이 없어서
 배설을 못하니 배가 팽창되어 견디기 어렵다.
 네가 가진 그 날카로운 침으로 내 배를 찔러
구멍을 하나 뚫어주면 내가 그 구멍으로 배설을
할 수 있겠으니, 제발 내 아랫배에 구멍을 하나
뚫어다오. 간절한 부탁이다."

이 부탁에 모기는 놀라면서 말하기를,
"너 무슨 큰일날 소리를 하느냐 ? 
근래에 도승지 이항복의 겸인은, 어떤 여인에게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배꼽 아래의 구멍을 다시
뚫어주었는데도 중죄에 걸려 구금되어 있지 않더냐?
 너는 본래 구멍이 없었기에 내가 새 구멍을
 뚫으면 죄가 훨씬 더 무거울 텐데, 내 어찌
그런 짓을 하겠니?  어림도 없다.

 날 죽일 소릴랑 하지도 말아."
이러고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날아가 버렸사옵니다.
"전하! 신이 이 이야기를 듣고서 의혹이
많이 생겨 좀 깊이 생각하느라고 그만 시간이
지체되었사옵니다. 통촉해 주옵소서."

이 얘기를 듣고 있던 선조 임금은 빙그레 웃으면서,
"내 또 경이 무슨 이야기를 할 줄 알았노라.
 지금 그 얘기는 옛날 동방삭의 해학과 비슷한 데가
있구나. 경의 겸인을 방면하겠노라."
그래서 이항복의 겸인의 죄는 불문에 부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