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시험에 아홉번 낙방한 송백기
용소에 몸던지려는 찰나에
어디선가 풍덩 소리가…
달이 네개다. 검푸른 밤하늘에 하나, 용소에 또 하나,
백기의 두눈에 고인 눈물 속에도 달이 하나씩 어른거린다.
‘스물두살 송백기는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구나.
친구들과 어울려 술 한잔 못 마셔보고, 여자 손목 한번 못 만져보고, 이렇게….’
백기가 용소에 뛰어들려는 순간 ‘풍덩’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눈물을 닦고 건너편을 봤더니 누군가 용소에 먼저 뛰어들어
휘도는 물살에 감겨 옷자락이 맴도는 게 아닌가.
백기는 자신도 모르게 뛰어들어 옷자락을 붙잡고 소용돌이와 사투를 벌였다.
죽을 힘을 다해 나뭇가지를 잡아 용소 밖으로 빠져 나와 물 속으로 뛰어든 사람을 보니 산발한 여인이다.
입에 입을 대고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짓눌렀다.
‘울컥~’ 입으로 물을 토하더니 여인이 눈을 떴다.
그러고선 돌아앉아 흐느끼기 시작하는 여인을 앞에 두고 백기는 난감하기 짝이 없다.
“낭자, 머리카락조차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거라 함부로 깎지 못하거늘
어찌하여 목숨을 멋대로 버리려 하는 거요?”
자신도 목숨을 내던지려 한 주제에 여인에게 훈계를 하려니 말이 꼬였다.
백기가 용소가에 두루마기와 갓, 그리고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은 것을
여인이 봤으니 들통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두 남녀는 살아온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백기의 아버지 송진사는 자신이 여덟번이나 과거에 낙방한 한을
맏아들 백기가 대신 풀어 주기를 바라고 갖은 정성을 쏟았다.
학동들과 어울려 논다고 서당에도 보내지 않고 사랑방에서 직접 글을 가르쳤다.
그래서 백기에겐 친구가 없다. 또래 아이들이 강에 물고기를 잡으러 가도,
콩서리를 가도, 반딧불이를 잡아도,
대보름날 쥐불놀이를 해도 백기는 제 집 사랑방에서 아버지 송진사를 마주 보고 글만 읽었다.
또래가 열일곱, 열여덟에 장가가서 아이를 낳아도 백기는 아버지와 사랑방에서 함께 자고
겸상 밥을 먹으며 글만 읽었다.
쪼들리는 살림에 백기 어머니는 친정에 가서 콩이며 보리·조를 얻어오고,
남의 집 큰일 치를 때 허드렛일을 도맡으며 밤이면 삯바느질을 했다.
백기는 초시엔 쉽게 붙었지만 한양에 올라가 치르는 과거는 보는 족족 떨어졌다.
이번에도 아홉번째 낙방하고 내려오다가 용소에 발길이 닿은 것이다.
백기보다 두살 많은 스물네살 여인은 열아홉에 시집가서
다섯해가 지나도 입덧조차 없자 시집에서 쫓겨났다.
소박맞은 여인이 친정으로 돌아가려다 발길을 돌린 곳이 용소였다.
이야기를 마친 두사람은 한숨만 토했다.
“낭자, 저승에서는 좋은 낭군 만나 아들 딸 낳고 아무 걱정 없이 사시오.”
그러자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던 여인이 화답했다.
“선비님도 저승에선 장원급제하셔서 어사화를 쓰시고 부귀영화를 누리십시오.”
두남녀는 용소에 뛰어들고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두손이 뜨거웠다.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속옷이 여인의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찢긴 속치마 밖으로 나온 새하얀 허벅지는 달빛에 아른거렸다. 백기가 여인을 와락 껴안았다.
용소 가장자리 넓고 평평한 바위에서 둘은 한몸이 되었다. 불덩어리가 되어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둥번개가 하늘과 땅을 붙여버렸다. 구름 위를 달리다가 으아악~ 나락으로 떨어졌다.
음양의 조화를 처음 겪은 백기는 생(生)의 환희에 들떴다.
화전민이 버리고 간 산속 너와집 단칸방에서 백기는 글을 읽고 여인은 부엌에서 밥을 지었다.
삼십리 밖 대처에 나가 여인이 지닌 금비녀 금반지를 판 돈으로 삼년은 거뜬히 살 것 같았다.
밤이면 작은 너와집은 쓰러질 듯 흔들리고 교성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달덩이 같은 여인의 눈에 눈물이 쑥 들어가고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두달이 지나자 여인이 입덧을 하기 시작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여인이 석녀(石女)가 아니라 전 남편이 씨없는 수박이었다.
‘이번에 또 떨어지면 심마니로 살아가면 되지 뭐.’
이렇게 마음먹고 한양으로 올라간 백기는 알성급제를 하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그때 산속 너와집에서는 ‘으앙~’ 우렁찬 아들의 울음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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