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하늘과 땅

써~니 2023. 6. 7. 15:21

 

대과에 떨어지고 고개 떨군 덕구

권위 찾으려 계책을 꾸미는데…



문 첨지가 훈장을 찾아왔다. 훈장은 문 첨지만 보면 곤혹스럽다.

문 첨지 아들 셋이 이 서당을 거쳐 가며 갖다 바친 물심양면의

정성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단 걸 훈장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주지육림 술판에 기생과의 잠자리까지 대접을 받았지만

문 첨지 아들 셋 모두 대과는 고사하고 소과에도 못 미쳐 초시 하나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훈장도 할 말은 있다. 특별과외를 그렇게 시켰건만 머리가 모자라는 걸 어찌하랴!

문 첨지가 이번에 찾아온 건 막내 외동딸과 짝을 지을 그럴듯한 사위놈을 구하기 위해서다.

훈장이 무릎을 쳤다. “안성맞춤이 있소이다

.” 문 첨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훈장 큰 소리를 믿을 수 있어야 말이지” 했다.

허기야 훈장 장담대로 일이 풀렸다면 장원 급제가 셋이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이승을 하직하자 홀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열여섯살 덕구는 다니던 서당을 그만두고

몇뙈기 밭에 목줄을 걸었다.

“그 애는 머리가 좋아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아요. 허우대도 좋고.”

덕구는 문 첨지 덕택에 다시 서당에 다니게 됐다.

덕구가 살길은 과거에 급제하는 길뿐이다. 정월 보름날도 책과 씨름했다.

훈장의 큰 소리가 이번에는 달랐다. 문 첨지는 덜컥 겁이 났다.

“저놈이 급제를 한 후 내 도움은 잊어버리고 양반 대갓집으로 장가가면 어쩌지?” 하며

부랴부랴 혼례를 올렸다.

문 첨지 외동딸 옥지는 덕구보다 세살 위, 열아홉이었다.

혼수로 논 서른마지기를 가지고 가 머슴까지 들여놓았다. 덕구는 죽어라 책과 씨름했다.

한해가 가고 옥지는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고 덕구는 소과에 합격했다.

집안에 웃음꽃이 폈다. 거기까지였다.

이듬해도 그 이듬해도 대과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간 덕구는

고개를 떨군 채 내려와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었다.

일곱번 미역국을 먹고 칠전팔기를 외치며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지만,

또다시 허탕을 치자 문 첨지도 훈장도 옥지도 그리고 덕구 자신도 기대를 접었다.

덕구도 할 말은 있다.

촛불 아래서 공부 좀 하려고 하면 부엌에서 뒷물하고 온 옥지가 촛불을 끄고 덕구를 껴안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덕구는 절구질할 때만 쓰임새가 있었지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됐다.

덕구 어미는 집안의 하녀처럼, 며느리의 몸종처럼 아들을 따라 죽어 지냈다.

“물 한그릇 떠오세요.” “팥죽이 먹고 싶네요.” “애기 기저귀 제때 제때 갈아주세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며느리 옥지가 제 시어머니에게 하는 말이었다.

칠거지악 중 아이만 낳았지 여섯가지는 활개치고 행하는 옥지였다.

덕구는 욱하는 성질대로라면 몽둥이로 옥지를 온몸에 멍이 들도록 두드려 패고

혼수로 받은 서른마지기 논을 돌려주고 싶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온갖 굴욕을 다 참을 수 있지만 밤일만은 아니었다.

거꾸로, 절구공이는 땅이 되고 절구통이 하늘이 된 것이다.

요즘 아이는 덕구가 업고 있고 옥지는 온갖 잔칫집 다 돌아다니고 어떤 날은 술냄새까지 풍겼다.

그날도 잔칫집에 갔다가 날이 어두워졌을 때 술 취해 집으로 와

훌렁 훌렁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덕구도 뒤따라 집으로 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절구질을 해대는데

온종일 춤을 춘 옥지는 깜박 잠이 들었다.

그때 안방 문이 꽈당 열리며 한 손에 초롱, 다른 손에 시퍼런 낫을 든 덕구가 들어오며

“웬 놈이냐!” 고함치자 옥지가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고 남자는

바지춤을 추스르며 문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저놈 잡아라!” 하자 머슴이 그놈을 잡았다.

덕구가 나가서 그놈 입에 재갈을 물리고 포박해 거적때기로 둘둘 말았다.

혼이 빠진 옥지는 마루에 나와 벌벌 떨며 안마당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적때기를 지게에 진 머슴에게 덕구가 말했다.

“돌을 달아서 저수지에 수장시키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칠흑 같은 적막이 천지를 덮었다.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던 옥지가 물었다.

“서, 서, 서방님, 웨, 웬, 노, 놈이요?” 덕구가 ‘네년이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라는 듯이

입을 꾹 다문 채 싸늘한 시선만 보냈다.

알고 있는 사람은 머슴뿐. 이튿날, 넉넉한 새경에 옥지의 금반지·금팔찌·옥목걸이 등

온 패물을 싸서 머슴에게 주며 입막음해서 떠나보냈다.

이후로 옥지는 덕구 앞에서 고양이 앞 쥐가 됐다.

“내 발을 씻어라.” 덕구 한마디에 뜨뜻한 물 한대야를 들고 와 디딤돌 위에 놓고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은 옥지는 마루에 걸터앉은 서방님의 발가락 사이를 뽀득뽀득 씻었다.

덕구와 덕구 팔촌 동생과 머슴의 합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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