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오실댁은 첫딸을 낳고 나서

써~니 2022. 12. 21. 16:57

오실댁은 첫딸을 낳고 나서 단산(斷産)을 하게 됐다.

임신 자체가 불가능해졌으니 강씨 가문에 대(代)가 끊어지게 된 셈이다.

오실댁의 한숨이 깊어가자 강 진사는 부인의 등을 두드리며

 

“부인, 아들만 자식이요?”

 

강 진사는 껄껄 웃으며 젖을 빨고 있던 딸아이를 번쩍 안아올려

 

“남자 열몫을 할 여걸이 될 거요.”

강 진사는 오실댁을 끔찍이 아꼈다.

글 친구들과 기생집에 가더라도 외박하는 일이 없었다.

강 진사는 어깨가 떡 벌어지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대장부라 기생들이 서로 옆에 앉으려 하고

술자리가 파하면 금침 속으로 끌어들이려 안달했지만, 강 진사는 뒤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갔다.

강 진사의 노부모는 은근히 아들이 첩실이라도 들여 손자 하나 쑥 뽑아내기를 바랐다.

오실댁이 어느 날 강 진사에게

 

“나으리, 소첩이 이 집 종부로 들어와 대가 끊어지게 한다는 것은 크나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제발 부모님 뜻을 받들어 대를 이으세요. 소첩은 절대로 시앗을 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인, 쓸데없는 소리요. 두번 다시 그런 말 입 밖에 내지 마시오.”

강 진사가 오실댁을 껴안자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강 진사의 가슴팍을 적셨다.

세월이 흘러도 부부금실은 변함이 없어 강 진사의 노부모는 손자를 안아보지 못한 채 이승을

하직했고 강 진사의 외동딸도 출가했다.

드넓은 집에 강 진사와 오실댁만 남게 된 것이다.

사랑방에 글 친구들이 놀러와 시조를 짓고 술잔을 돌리는 게 강 진사의 일과요,

안방에서 사군자를 치고 안뜰과 뒤뜰에 기화요초를 보듬는 게 오실댁의 일과다.

앞뜰의 백매, 뒤뜰의 홍매가 피어날 때면 오실댁은 매화 밑에 평상을 놓고 강 진사의 글

친구들을 초청해 지난해 유월에 담갔던 매실주를 걸러냈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희미해지고 시집간 딸이 줄줄이 아들 셋을 뽑아내 강 진사와

오실댁은 전에 없이 희색이 만면한데, 호사다마라던가, 시가 친척집 상가에 가서

며칠 일을 하고 돌아온 오실댁이 드러누웠다.

열이 나고 통시를 들락날락하던 오실댁이 처서가 지나면 일어나겠지 했는데 웬걸,

온몸이 불덩이처럼 열이 나고 통시에 갈 기력도 없어졌다.

장례 준비를 하라는 의원의 말에 강 진사가 의원의 멱살을 쥐고 울부짖었다.

그날 밤 숨소리가 끊어질 듯하더니 닭이 울자 맥박이 뛰고 푸르던 얼굴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미음을 먹고 설사가 멈췄다.

사흘이 지나자

 

“나으리, 어디 계세요?”

“여보 부인, 나 여기 있잖소!”

 

손을 뻗쳐 강 진사의 얼굴을 더듬으며

 

“어디? 어디 있소?”

 

목숨은 건졌지만 오실댁은 장님이 됐다.

하늘은 깨어질 듯 파랗고 만산은 홍엽인 날 강 진사가 명아주 지팡이 끝을 잡고

가을 들길로

나서자 오실댁이 반대편 끝을 잡고 뒤따라오며

 

“나으리, 끼룩끼룩 하는 저 소리는 기러기 아닌가요?”

“맞소, 열댓마리가 남쪽으로 날아가네요.”

 

부부는 장터에도 가고 강가도 가고 명창들의 노래판에도 갔다.

“나으리, 나는 앞을 못 봐도 나으리와 함께 다니고, 나으리의 설명이 뜬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아름답다는 걸 알아 너무 행복합니다.”

 

강둑에 앉아 강 진사가 오실댁을 꼭 껴안고 시조를 읊기도 했다.

 

“흘러가는 저 물은 어디로 가는가… 콜록콜록!”

“나으리 감기에 걸렸네요.”

그렇게 3년이 흐른 어느 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부인, 이제부터 혼자 다니시오. 나도 이제 술집에도 가고 친구도 만나며 내 시간을 갖겠소.”

 

오실댁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강 진사가 문을 닫고 나가자 오실댁은 북받치는 설움에 이불을 덮어쓰고 대성통곡을 했다.

이날부터 언제나 안방에서 오실댁을 꼭 껴안고 자던 강 진사가 사랑방에서 혼자 자기 시작했다.

오실댁은 닷새를 누워 있다 은근히 악이 받쳤다.

지팡이를 짚고 혼자 다니며 넘어지고 일어서며 이를 악물었다.

가을이 올 때까지 강 진사는 한번도 안방을 찾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멀리 사랑방에서 나던 기침 소리도 나지 않았다.

깊어가는 가을날 노스님이 찾아왔다.

시부모님 계실 때부터 연을 맺은 솔거암의 주지스님이다.

노스님이 보자기에 싼 함을 오실댁 앞에 놓으며

 

“강 진사의 유골이오. 앞마당 백매 밑에 묻어달라 했소.”

 

흐느끼는 오실댁에게 노스님은 무겁게 말을 이어갔다.

“부인이 지팡이를 짚고 혼자 다닐 때도 강 진사는 부인 몰래 열댓걸음 뒤에서 따라다녔소.

 강 진사의 폐병이 깊어졌소. 죽음이 닥쳐온다는 걸 알았지요. 부인에게 폐병을 옮겨서도

 안되고 정(情)도 떼야 했소. 백약이 무효, 하룻밤에 한요강씩 피를 토하자 소승의 암자로

 실려와 삭발하고 며칠 뒤에 입적했소이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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