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사미승 차림의 내아들

써~니 2023. 6. 14. 14:49

가족 잃고 30년간 객지 떠돈 홍 생원
관상쟁이로부터 묘한 말을 듣는데…



홍 생원도 이제 기력이 옛날같지 않다.

고개 하나 넘는 데 벌써 두번째 눈밭에 털썩 주저앉은 참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다 곰방대에 담배를 쑤셔넣는데 바람 소리뿐인 적막강산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가봤더니 어미 고라니 한마리가 올무에 걸려 발버둥치다 지쳐 쓰러져 있고

새끼 두마리는 어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홍 생원이 올무를 풀어주자 어미는 일어나 새끼 둘을 데리고 사라지며 등

너머로 몇번이나 홍 생원을 돌아봤다.

홍 생원은 방물고리짝을 메고 재를 넘어 주막에 들어섰다.

세밑이 되니 손님이라고는 가끔 마주쳐 얼굴이 익은 떠돌이 관상쟁이뿐.

주막이 휑하니 평상에 눈만 쌓였다.

평소에는 대작하는 사이가 아니지만 주모와 함께 셋이서

개다리소반에 둘러앉아 술잔이 오가게 됐다.

설을 코앞에 두면 대목장도 봐야 하고 놋그릇도 닦아야 하고 창호지도 새로 발라야 하는데

객지를 떠도는 팔자야 캐보지 않아도 뻔할 뻔자라

서로 가슴만 찌르는 과거사는 들춰내지 않았다.

서로 말없이 술을 마시다 떠돌이 관상쟁이가 어른거리는 관솔불에 비친

홍 생원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더니

“관상이 바뀌었소! 당신 얼굴이!” 흠칫 놀라더니 이 돌팔이 관상쟁이가 홍

생원의 가장 아픈 곳을 송곳으로 찔러서 비틀었다.

“아들을 얻겠소.”

술을 더 마시면 관상쟁이를 패대기칠 것 같아 홍 생원은 객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덮어쓰고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첫날밤, 얼굴 예쁘고 마음씨 고운 새색시를 품고 무지개꿈을 꿨었지.

몇달 후 새색시가 헛구역질하자 밤마다 새색시 배에 귀를 대고 아기 태어날 날만 기다렸는데

악몽 같은 날이 닥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새색시와 고추 달린 태아를 함께 묻고 내려오던 날 천지신명에게 복수를 맹세했다.

홀로 된 고모에게 집을 맡기고 새색시와 아들이 함께 잠든 묘지에 가서 눈물을 흠뻑 뿌리고

눈발이 휘날리는 한 맺힌 고향산천을 등졌다.

그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십년이 흘렀다.

산천이 세번이나 변한다는 그 기나긴 세월, 홍 생원은 고향 근처에도 가지 않고 팔도강산을 쏘다녔다.

엿장수·갓장수·지필묵장수·새우젓장수…. 주머니에 돈이 떨어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세상의 온갖 못된 짓은 가리지 않고 다했다.

사기·도둑질·노름·싸움박질…. 흠씬 두드려 맞을 때가 시원했다.

그렇게 굴러다니다보니 몸도 자주 아프고 마음도 약해졌다.

그걸 잊으려고 30년을 자신에게 매질했는데 허사였다.

내 색시가 내 아들을 안고 누워 있는 묘지는 누가 벌초라도 했을까.

집을 지키고 있는 고모는, 내 친구 욱래는, 억보는, 상태는, 동네 앞 개울은, 뒷산은?

세밑에, 30여년 만에 혈혈단신 고향으로 돌아가는 홍 생원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대목장을 봐서 뭔가 얘기하며 웃으며 제집으로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이틀만 더 걸으면 고향이다.

홍 생원이 까치고개를 넘을 때 탁발사미승과 동행을 하게 됐다.

귓불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열서너살 남짓이었다.

“스님은 무슨 연유로 이렇게 일찍 불문에 귀의했소?”

사미승이 슬픈 눈으로 홍 생원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모깃소리만 하게

“사실은 아버지 찾으러 다니는 길이에요. 돈 없이 돌아다니는 데는 사미승 차림이 좋아요.”

홍 생원이 “나는 팔도강산 떠돌아다니며 무수한 사람을 만났소. 혹시 내가 도울 수도….”

사미승 차림의 그 소년이 사연을 털어놓았다.

“어머니가 삼년 전 돌아가시기 전에 제 출생 비밀을 알려주더라고요.”

소년이 숨을 가다듬고 얘기를 이어갔다.

“여름날 콩밭을 메다가 멱을 감고 옷을 입는데 누군가 뒤에서 덮쳤다네요.

우리 어머니는 그때까지 시집을 못갔어요.

심한 천연두를 앓아서. 평생 홀몸으로 사셨지만 우리 어머니는 참으로 착했어요.”

홍 생원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모친이 그 사람 얼굴을 봤대?” “얼굴은 못봤지만 새우젓 냄새가 났대요.”

홍 생원의 얼굴이 하얘지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며, 몇살이냐?” 목소리는 떨렸다. “제 나이요? 열셋이에요.” 홍 생원이 손가락을 짚어보자

머릿속이 그때 그 기억으로 꽉 찼다.

‘치마로 머리를 덮었던 것은 얽은 얼굴을 감추려 했던 거였어.’

십이삼년 전 홍 생원은 새우젓장수였다.

소년을 뼈가 부서져라 껴안으며 얼마나 큰소리로 고함쳤는지 사방에서 메아리쳐 돌아왔다.

“내 아들이야, 야,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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