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품격 있는 적선

써~니 2023. 6. 21. 14:42

조 진사 대신 술값 계산한 점쟁이 친구
며칠 후 거액의 복채를 받게 되는데…


조 진사가 지필묵을 사려고 오랜만에 친히 장터에 나왔다.

세후 첫 장날이라 점쟁이 좌판이 보였다.

조 진사는 ‘올해 운세나 한번 볼까나’ 하고 발걸음을 멈추고,

거적때기를 깔고 쪼그려 앉아 있는 점쟁이 앞에

두루마기 자락을 추스르며 주저앉았다.

꾀죄죄한 점쟁이가 육갑을 짚어보더니

“칠월에 물 조심만 하면 운수대통은 아니더라도 무병무탈이오.”

조 진사가 껄껄 웃으며 “이 나이에 무슨 대통할 일이 있겠소,

무병무탈이면 족하지.”

바로 그때,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어~이게 누구야!” 점쟁이와 조 진사는 서로 두손을 마주 잡았다.

두사람은 국밥집에 마주 앉아 탁배기 잔을 부딪히며

지난날 서당시절로 얘기꽃을 피웠다.

점쟁이가 킬킬 웃으며

“그날 밤 버드나무 위에 올라가 동네 처녀들 멱 감는 거 훔쳐보다

네가 떨어져 개울에 풍덩!”

조 진사는 그게 어제 일처럼 생각나

“푸하하~ 푸르르.” 입속의 탁배기를 쏟아내며 뒤집어졌다.

이웃에 살던 개구쟁이 불알친구 두사람은

삼십여년 만에 처음 만나 술잔을 주고받으며

그리운 그 시절로 돌아갔다.

웃음이 끊이지 않던 분위기가 한숨으로 바뀐 것은

조 진사가 점쟁이 친구의 살아온 길을 물어본 후였다.

점쟁이 친구는 열다섯살 때 삼년 동안 몸져누웠던

아버지가 빚만 잔뜩 남기고 이승을 하직한 후 빚을 감당할 수 없어

어머니와 동생 둘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했다.

타향을 떠돌며 가장으로 온갖 고생 다하며 살아온 얘기에

조 진사는 눈시울을 붉혔다.

점쟁이 친구가 말하길 “나이를 먹으니 고향 생각이 나지 뭔가.

세밑에 돌아와 그간 좀 모아뒀던 돈으로 삼십년 전 야반도주할 때 졌던

빚 다 갚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이 짓을 하고 있네.”

어둠살이 내려앉고 술도 올라 일어서서 술값을 계산하려던 조 진사는

역정을 냈다. “통시 가는 게 수상쩍더니!”

술값 계산을 점쟁이가 벌써 해버리고 나서

“자네가 준 복채로 했으니 자네가 술을 산 거야.”

며칠 후, 부티나는 노인네가 두리번거리더니

조 진사 친구 점쟁이 앞에 앉았다.

“내가 크나큰 갈림길에 서 있소. 할 건가 말 건가?”

점쟁이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나는 그렇게 용하지 않소이다. 다른 데 가서….”

“다른 데서도 점괘를 봤소. 한번 봐주시오.”

육갑을 짚어본 점쟁이 왈 “하지 마시오. 늙어선 대통보다는 무탈이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복채 한냥을 놓고 갔다.

열흘쯤 지나 그 부티 나는 노인네가 다시 찾아와

점쟁이의 두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모두가 하라 했는데 도사님 혼자 하지 마라 했소. 그 말이 맞았소!

패가망신 당할 뻔했소. 복채를 제대로 드려야지요.”

거듭 고맙다고 고개를 조아리며 주머니 하나를 놓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노인의 도포 자락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있던 점쟁이는

주머니를 열어보고 기절할 뻔했다. 엄청난 돈이 들어 있던 것이다.

강 건넛마을 강 대인 사랑방에 조촐한 술상을 두고

두사람이 마주 앉았다.

이 집주인 강 대인과 조 진사다.

조 진사가 강 대인에게 술 한잔을 올리며

“외삼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하자, 술잔을 받아 마신 강 대인이

“자네가 그토록 속이 깊은 줄 몰랐네”라고 말했다.

조 진사가 대답하길 “외삼촌 누님한테 배웠어요.”

“내 누님이라니?” “제 어머님 말이에요, 크크크.”

강 대인은 조카 조 진사의 부탁을 받고 점을 본 뒤

복채 주머니를 던져주고 온 그 부티 나는 노인이다.

조 진사가 아홉 아니면 열살쯤 됐을까.

장날, 어머니 손을 잡고 장터에 갈 때였다.

어머니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내 주머니!” 아무리 찾아봐도 돈주머니가 없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저만치서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헐레벌떡 오고 있었다.

한손에는 어머니가 흘린 빨간 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길바닥에서 이 주머니를 주웠지만 제 걸음이 이 모양이라

빨리 오지 못했네요.”

그가 주머니를 어머니에게 건네주고 뒤돌아가는데

“여보시오!” 하며 어머니가 그 노인네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주머니 속의 돈을 헤아리더니

“이 주머니는 내 것이 맞지만 내 주머니엔 분명히

열두냥이 들어 있었으니 이 나머지는 내 돈이 아니오” 하며

한움큼 돈을 집어 그 노인네 조끼 주머니에 찔러줬다.
*
*
*
*
*
그 얘기를 듣고 강 대인이 빙긋 웃었다.

'야담, 야설,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미승 차림의 내아들  (1) 2023.06.14
하늘과 땅  (3) 2023.06.07
그 여인  (0) 2023.06.01
형제  (1) 2023.05.25
춘양 주모  (0) 2023.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