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285

덕담

땀을 뻘뻘 흘리며 아궁이에 장작 넣으랴 주걱으로 가마솥의 조청 저으랴 바쁜 와중에도 주실댁의 머릿속은 선반 위의 엿가락 셈으로 가득 찼다. ​ ​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 그저께 팔다 남은 깨엿 서른세가락을 분명 선반 위에 얹어 뒀건만 엿기름 내러 한나절 집을 비운 사이 스물다섯가락 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건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 방에는 열한살 난 아들밖에 없고 그 아들은 앉은뱅이라서 손을 뻗쳐 봐야 겨우 문고리밖에 잡을 수 없는데 어떻게 엿가락이 축날 수 있단 말인가? ​ 추실댁은 박복했다. ​ 시집이라고 와 보니 초가삼간에 산비탈밭 몇마지기뿐인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다 신랑이란 게 골골거리더니 추실댁 뱃속에 씨만 뿌려두고 이듬해 덜컥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 장사를 치르고 이어서 유복..

묵집 과부와 박 서방

묵집 과부를 마음에 품은 공 초시 어느 날 박 서방과 있는 걸 보는데… ​ 밤은 깊어 삼경 때, 공 초시가 사랑방에 홀로 앉아 곰방대로 연신 담배연기만 뿜어대며 시름을 달래고 있다. 그때 애간장을 끊듯이 울어대는 뒷산 소쩍새가 공 초시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3년 전 부인을 저승으로 보내고 탈상도 하기 전에 무남독녀 외동딸이 석녀(石女)라고 시집에서 쫓겨나 친정 초당에 똬리를 틀었다. 부인이 이승을 하직한 것은 제 명(命)이 그것밖에 안됐고 외동딸이 과부 아닌 과부가 돼 친정살이하는 것도 제 팔자. 요즘 공 초시의 시름은 자신의 신세타령이다. ​ 제 나이 이제 마흔일곱, 아직도 살날이 까마득한데 이렇게 남은 생을 홀아비로 외롭게 살아가려니 앞이 캄캄해졌다. 공 초시는 나이가 젊고 허우대가 훤칠..

백정과 지참봉

풍수지리에 통달한 이름난 지관이 산 넘고 물 건너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 골짜기에 깜박이는 불빛을 찾아 초가삼간 사립문을 두드리자 집주인이 초롱불을 들고 나왔다. “이 근방에 주막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시오.” “주막은 30리 밖에 있습니다. ​ 딱하게 되셨군요. ​ 누추하지만 저희 집에서 유하고 떠나십시오.” 지관은 염치 불구하고 그 집으로 들어가 잠만 자고 저녁은 굶을 작정을 했는데, 웬걸 걸쭉한 곰국 저녁상까지 받았다. 저녁상을 물리고 호롱불 아래서 탁배기잔을 나누며 두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 사십대 초반의 마음 착한 집주인은 직업이 백정이었다. “뼈가 빠지게 일을 해도 가난의 족쇄를 벗을 길이 없습니다요.” 이튿날 아침상까지 받고 난 지관은 긴 수염을 쓰다듬고 나서 집주인을..

다산댁과 허진사의 아들

서른이 갓 넘은 다산댁은 벌써 아들을 일곱이나 뒀다. ​ 언제나 막내 젖을 떼자마자 또 배가 불러 올라 열달이면 어김없이 가을무 뽑듯이 아들을 낳았다. ​ 어느 날, 나이 지긋한 할미가 찾아와 다산댁을 놀라게 했다. “욱천의 허진사는 만석꾼 부자이지만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씨받이를 찾고 있네.” 욱천이라면 40리 떨어진 고을이다. ​ 그 매파는 다산댁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애도 못 낳는 허진사 부인은 세도가 친정을 믿고 어찌나 기가 센지 허진사를 한눈 팔지 못하도록 해 놓고 씨받이를 찾고 있네. ​ 그 임무를 내가 맡았지만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60리 안의 온 동네를 석달이나 쏘다녀 봐도 헛걸음만 했는데, ​ 강 건너 마을에서 다산댁 얘기를 듣고 이렇게 찾아왔네.” 다산댁이 펄..

청상과부 심실이

마흔다섯살 먹은 과부 ‘심실이’는 못 볼 걸 봤다. 마실 가서 밤늦도록 길쌈을 삼다가 이경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갓집 덕주네 봉창 앞에서 발걸음이 멎었다. 동갑인 덕주 어미의 자지러지는 소리와 덕주 아비의 가쁜 숨소리가 봉창으로 터져 나왔다. ​ 처마 밑 발디딤 위에 올라 봉창 구멍에 눈을 댄 심실이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 호롱불을 밝혀 놓은 채 시커먼 양물을 곧추세운 덕주 아비는 덕주 어미를 엎었다 뒤집었다 자유자재로 주무르며 쉼없이 절구질을 해댔다. 몸이 불덩어리가 된 심실이는 집으로 돌아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도 열이 식지 않았다. ​ 끊임없이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에 과부 심실이의 한숨은 깊어 갔다. 돌이켜 보면 자기 신세가 한스럽기만 하다. ​ 열여섯에 시집와 보니, 세살 아래 신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