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285

장인 될 놈

어느날 오 진사를 찾아온 노스님 보물상자 묻힌 곳을 알려주는데… 오 진사네 집에 노스님이 찾아왔다. 오 진사는 노스님을 사랑방으로 모셔 “나를 찾는 이유가 뭐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오 진사 나리께 금은보화를 안기고 소승도 구전을 좀 뜯어 비 새는 암자 지붕이나 손보려고 합니다.” 오 진사가 바짝 다가앉았다. 누가 들을 새라 문을 휙 열어본 후 노스님이 한 얘기는 이렇다. 15년 전, 어느 날 밤. 노스님의 암자에 피투성이가 된 털보가 기어오다시피 들어와 픽 쓰러졌다. 그의 옆구리는 칼에 찔려 유혈이 낭자했다. 첩첩산중 음각골 산적들의 산채를 관군이 기습해 산적들은 풍비박산, 산적 두목도 칼을 맞고 암자까지 도망쳐온 것이다. 노스님이 죽을 끓여주고 약을 달여줬지만 그해 가을을 못 넘기고 산적 두목..

외딴집에 주막집 주모

외딴집에 주막을 차려 주모가 되었다 산허리 고갯길을 한걸음 두걸음 무거운 발걸음으로 오르는 새우젓 장수. 고갯마루 초가집 삽짝에서 내려다보던 홍매는 종종걸음으로 내려가 새우젓 지게를 떠밀어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몸이 성치 않아 두손으로 지팡이를 움켜쥔 채 한숨만 쉬고 있다. 굽어진 고갯길에서 보이지 않던 새우젓 장수가 마침내 또렷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바닥만 한 마당에 새우젓 지게를 괴어 놓고 홍매가 떠온 냉수를 한사발 얻어 마신 고서방이 쪽마루에 털썩 주저앉으며 환한 웃음을 날려 인사를 대신한다. “얼마 만인가. 열흘도 넘었제?” 홍매의 물음에 “8일 만이라우” 하는 고서방. 담뱃불을 붙이며 쳐다보니 홍매의 얼굴엔 주름살이 부쩍 늘어났고 허리는 더 굽었다. 새우젓 장수 고서방과 늙은 퇴기 홍매는 쓰러져..

매형

호의호식하던 천석꾼 유 진사 어느날 탁발승과 맞닥뜨리는데… 유 진사가 점심 수저를 놓고 솟을대문 밖으로 나갔다. 뒷짐을 지고 발아래 펼쳐진 황금 들판을 내려다보니 빙긋이 입이 벌어졌다. 그때 지나가던 한 탁발승이 삿갓을 푹 눌러쓴 채 “쯧쯧쯧, 운세가 정점을 찍었구랴!” 탁발승은 유 진사에게 이끌려 사랑방에 앉았다. “여봐라, 여기 곡차를 올리렸다~.” 둘이 주거니 받거니 몇순배 청주를 돌린 뒤 유 진사가 물었다. “정점을 찍다니요? 이제는 내려갈 운세요?” 스님은 여전히 삿갓을 눌러쓴 채 “하강곡선을 그리는 게 아니라, 절벽에서 떨어지듯이 급전직하하겠소이다.” 유 진사가 너털웃음을 짓더니 “땡초가 못하는 말이 없네.” 문을 발로 차며 “여봐라, 하인들을 모두 모이도록 하라.” 그러자 탁발승이 삿갓을 올..

저승 사기꾼

우 처사가 죽었다. 일찍이 부인을 여의고 슬하에 자식도 없이 홀아비로 살다가 며칠 앓아눕더니 속절없이 이승을 하직한 것이다. 우 처사는 학식이 높고 주역에도 통달해 동네 까막눈들 제문을 써주고 입춘첩도 써주었고 때때로 사주도 봐주고 택일도 해 인심을 잃지 않아서인지 이집 저집에서 밥을 해오고 술이 들어와 제법 상가 분위기가 익었다. 친구들이 상복에 두건을 쓰고 상주 노릇을 했다. 입관을 해서 병풍을 쳐 놓고 친구들은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는데 밤이 깊어지자 모두가 쏟아내던 말도 끊어지고 뒷산 소쩍새만 애타게 울어댔다. 바로 그때, 병풍 뒤에서 탁탁탁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가느다란 음성이 흘러나왔다. 밤을 새우려고 앉아 있던 친구들이 모골이 송연해져 병풍을 홱 잡아채자 관 속에 “나 돌아왔어.” 명주실 같..

그믐달

우 생원이 그린 조잡한 그믐달 모두가 조롱하고 비웃는 그림을 부자 영감이 비싼값에 사가는데… 지필묵 장수, 우 생원이 어느 날부터인가 화공(畵工)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저잣거리 화상(畵商)들이 몰려 있는 곳에 제 그림을 들고 나타난 우 생원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모든 화상들이 외면하는데 어느 짓궂은 화상이 우 생원을 놀리며 그림이나 한번 보자고 두루마리 족자를 펼쳤다가 가게가 뒤집어지도록 폭소를 터뜨렸다. 감나무 가지에 걸린 그믐달 그림이다. “우 생원, 달을 그리려면 둥근 만월을 그리든가 새로 태어나는 초생달을 그려야지 기울어지는 그믐달을 그려 놓으면 누가 사가서 자기 집 벽에 걸겠는가. 쯧쯧쯧…” 그림도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어르신, 전시나 좀 해주세요. 팔리면 어르신이 칠을 먹고 제게는 삼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