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285

배과수원 주인

아이들 배서리에 몹시 화가난 오생원 송사해도 안되자 팻말을 세우는데… 오 생원이 하루에도 몇번씩 얼굴을 마주하는 한동네 사는 세사람을 발고(發告), 사또 앞에서 송사가 벌어졌다. 그들의 죄목은 서당 다니는 자식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구쟁이들이 밤에 오 생원의 배 과수원에 들어가 서리를 하다가 잡힌 탓이다. 애들은 종아리가 찢어지도록 회초리 타작을 당했고, 그 부모들은 배값으로 열닷냥씩 내라는 소송이었다. ​ 사또가 오 생원에게 물었다. ​ “밤에 과수원에 들어온 학동들을 잡았을 때 그 녀석들이 배를 몇개씩 땄는고?” ​ 오 생원이 “어흠 어흠” 헛기침을 하더니 대답했다. “그때는 한개밖에 안 땄지만 그간 수없이 도둑맞은 게 모두 그들 짓이라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요.” ​ 사또가 한숨을..

작은 고추가 맵다

작고 말랐지만 깡이 있는 지생원 당나귀 고삐를 감나무에 묶었는데 덩치 큰 젊은 선비가 말을 끌고와… 붓장수 지 생원은 환갑이 지났건만 아직도 한달이면 스무날은 손수 붓을 만들고, 열흘은 붓을 팔러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 겨울이면 강원도 영월로, 정선으로 돌아다니며 족제비, 담비, 수달피를 사냥꾼으로부터 사들였다. 담비 목털로 세필(細筆) 붓을 만들고 족제비 꼬리로 중필 붓을 만들었다. 강원도를 쏘다니고, 만든 붓을 팔려고 이곳저곳을 다닐 때 지 생원의 발이 되고 동무가 되는 것은 당나귀다. ​ 지 생원은 오척 단신에 피골은 상접해 바람이 세차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생김새다. 하지만 깡이 있어 남에게 지는 법이 없다. 평소 안면 있는 장돌뱅이가 “지 생원! 나무 잡아, 바람 불어”라고 농을 던지면, 생..

좋을지 나쁠지

근본이 어부인 사또 ‘어판득’ 동헌 전속 마의원과 바다로 나갔다가 배에서 그만 못에 손가락을 찔리는데… 황해도 해주 사또, 어판득은 근본이 어부이다. 고기잡이배를 사서 선주가 되더니 어장까지 사고, 해주 어판장을 좌지우지하다가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어찌어찌 한양에 줄이 닿아 큰돈을 주고 벼슬을 샀고, 평양감사 아래 얼쩡거리더니 마침내 해주 사또로 부임했다. 그는 그렇게도 바라던 고향 고을의 원님이 되어 권세도 부리고 주색잡기에도 빠졌다. 그렇지만 즐겁지 않고 뭔지 모를 허망함만 남을 뿐이었다. ​ 처서도 지나고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던 어느 날, 사또는 동헌에 앉아 깜빡 졸았다. 사또는 어판득이 되어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그물을 끌어올렸다. 조기떼가 갑판 위에 펄떡이자 그도 조기와 함께..

노총각 심마니

색줏집을 때려 부숴 곤장 맞고 술 취해 인사불성이 된 ‘덕배’ 재를 넘어 가는 길에 한 여인이… 하룻밤 옥살이 끝에 동헌 앞마당에서 곤장 열대를 맞고 관아를 빠져나온 덕배는 곧장 주막으로 들어가 탁배기(막걸리)를 퍼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덕배는 노총각 심마니다. 조실부모하고 어릴적부터 약초꾼인 당숙을 따라 이산저산을 헤매고 다녔다. 그런데 당숙이 몸져눕자 외톨이 심마니가 되어 가끔 현몽을 꿔 산삼을 캐면 한의원에 팔아 목돈을 챙겼다. ​ 노총각 덕배는 6척 장신에 어깨가 떡 벌어져 풍채가 좋다. 이따금 산삼을 캐다가 부러진 것들은 자신이 와그작 먹어버리고, 허구한 날 비호처럼 산을 타다보니 허벅지는 한아름이요, 장딴지는 옹기만 하다. 하지만 밤이 되어도 넘치는 힘을 쏟을 곳이 없어 용두질로 달래곤 한..

백송(白松)

천석꾼 부자 백 진사…폐병 걸린 7대 독자와 시들어가는 백송 걱정에 한숨 그해 봄, 아들이 색주집을 드나들고 백송 가지마다 솔방울 달리는데… 천석꾼 백 진사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이 걱정 저 걱정 으로 잠을 못 이뤘다. 그러다가 홑적삼만 걸친 채 밖으로 나와 구름 걷힌 하늘에 오랜만에 두둥실 떠오른 만월(보름달)을 쳐다보고 간청했다. “천지신명이시여, 소인을 데려가고 두 목숨을 살려주소서.” 백 진사가 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두 생명은 중 하나는 7대 독자인 아들 윤석이고, 다른 하나는 백송(白松)이다. 열일곱살 윤석이는 폐병이 깊어 기침이 끊이질 않고, 밤이면 요강에 검붉은 피를 토한다. 파리한 얼굴에 두 눈은 쑥 들어가고 광대뼈는 솟아올랐다. 키는 삐죽하게 컸지만 피골이 상접했다. 아들이 둘만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