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285

신관 사또가 부임했다

신관 사또가 부임했다. 훤한 신수에 긴 수염, 꽉 다문 입에 위엄이 서렸다. 지방 토호들이 환영 연회를 옥류정에서 질펀하게 열었다. 열대여섯살 동기들도 있었는데 사또는 굳이 기생들이 이모라 부르는 옥류정 여주인을 수청 기생으로 지명했다. “사또 나으리, 쇤네는 나으리를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어리고 예쁜 아이들이 수두룩한데 이 늙은 쇤네를 부르시는 것은 쇤네를 놀리시는 거지요.” 사또는 막무가내였다. 사실 옥류정 여주인은 나이가 서른하나로, 이팔청춘은 아니지만 우아한 자태에 지적인 얼굴이라 한량들이 한번쯤 품어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여주인은 신랑도 없으면서 한번도 몸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허나 어느 명이라고 거절하랴. 그날 밤, 주연을 파하고 안방에 들어가 사또는 이모 배 위에 객고를 풀었다. 그 뒤로..

황참봉이 엉엉운 사연

황참봉이 엉엉운 사연 황참봉이 비단 마고자를 입고 뒷짐진 손에 장죽을 들고 집을 나서면 마주치는 사람마다 황참봉에게 절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어르신 행차하셨습니까?” “음.” 서당 다녀오는 아이들도 코가 땅에 닿을 만큼 허리를 굽혀 “참봉할아버지 만수무강하십시오.” 하고 인사를 했고, 물동이를 인 아낙들도 물동이를 땅에 내려놓고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하고 허리를 굽혔다. 심지어 황참봉의 연배들도 허리 숙여 인사했다. 불룩 나온 배를 뒤뚱거리며 저잣거리를 걸어가도 황참봉은 인사받기에 바쁘다. 황참봉은 이 고을 사람 모두가 자신을 우러러 보는 게 흡족해서 때때로 이 골목 저 거리를 돌아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세차게 내리던 밤, 삿갓을 눌러쓰고 둑길을 걸어 집으로 가던 황참봉은 그만 발이 미끄러..

젊은 여인의 재치

야설-젊은 여인의 재치 과거에 낙방하고 말을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박도령은 한숨을 쉬는 대신 휘파람을 불어댔다. 처음 본 과거 시험이었고 조금만 더 공부를 하면 내년엔 거뜬히 붙을 것 같은데다 천성이 원래 낙천적이다. 꽃피고 새우는 춘삼월 호시절에 산들바람은 목덜미를 간질러 대고 만산에는 진달래가 붉게 타오르며 나비는 청산 가자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게으른 숫말은 책찍질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걸음을 재촉했다. 산허리를 돌자 박도령은 고개 끄덕이며 빙긋이 웃었다. 엉덩이가 빵빵한 암말이 꼬리를 흔들며 앞서 가고 있었다. 암말 위에는 초로의 영감님이 첩인 듯한 젊은 여인을 뒤에서 껴안은 채 산천경개 구경하며 한가로이 가고 있었다. 박도령의 숫말이 재바른 걸음으로 암말 사타구니 가까이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

기생과 부인의 차이점

◈기생과 부인의 차이점◈ 원제 : 都事責妓 (도사책기) 서관문관(西關文官)이 본부도사(都事)가 되어서 장차 임소(任所)에 부임 할 때에 한 역(驛)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튿날 아침 말을 바꾸어 타니, 마상(馬上)이 요동하여 능히 견뎌 앉아 있을 수가 없거늘, 급창(及唱)이 가만히 도사에게 고해 가로되 『만약 역장한(驛長漢)을 엄치(嚴治)치 않으면 돌아오실 때 타실 말을 또한 이와 같이 하리니, 안전케 오직 소인 거행으로 쫓게 하시면 원로 행차를 평안히 하시게 되오리다.』 도사가 허락하였더니, 급창이 사령을 불러 그 역의 병방(兵房)과 도장(都長)을 결장(決杖)하고 『별성(別星) 행차의 앉으시는 자리를 어찌 이와 같은 용렬한 말을 내었는고? 이 말은 앉을 자리가 불편한 고로 곧 다른 말로 바꾸어 드리라...

치마 밑으로

치마 밑으로 들어간 김장철이 다가오자 새우젓값이 뛰기 시작했다. “허가가 황해 새우를 싹쓸이했다며?” “새우젓값이 하늘을 찔러야 풀 모양이지. 마포나루의 새우젓 도매상들은 물건이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첫서리가 온 날 허항의 새우젓 배들이 마포나루에 들이닥쳤다. 이른 저녁, 명월관에 나타난 허항은 돈표를 방바닥에 펼쳐 놓고 명월관 대문을 잠그라고 큰소리쳤다. “추엽이는 어디 있느냐?” 천하의 오입쟁이 허항이 주인 여자를 다그치자 허항이 명월관을 수시로 드나들었지만 추엽은 몸을 허락하지 않았다. 빼어난 미모에 기품을 갖춘 추엽은 집안이 망해서 비록 술을 따르는 신세가 되었지만 절대로 몸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이 달아오른 허항과 그가 새우젓 선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명월관 주인 ..